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찬백| 선을 그어 주던가 二

그 날의 기억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살. 

개강과 동시에 새내기 기운에 흠뻑 젖어 하릴없이 캠퍼스 안을 걸어 다니던 제가, 동아리 신청서를 뿌리고 다니는 선배에게 이끌려 학생 회관으로 들어갔을 때 였다. 제 품 안으로 A4용지를 떠밀 듯 쑤셔 넣고 2층으로 가봐! 소리를 지른 그녀의 말에 버석거리는 하얀색 종이와 회색 계단을 번갈아 바라보던 제가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2층에 도착했을 때.

 

위에서 아래로 저를 내려다보던 그와 눈을 마주하며 백현은 제일 먼저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본다.’ 는 생각을 했다. 입술이 슬쩍 벌어지고 손에 힘이 빠져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던 제 손 아래로 슥- 종이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고 나서야 제 시선이 떨어졌을 만큼, 백현은 처음 만남에서부터 온통 찬열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다.

 

미끄러지는 A4용지가 완전히 품을 벗어나기 직전 용지를 잡아, 그의 앞으로 내민 제 손을 바라보던 시선에는 손이 떨리지는 않는지. 직접 확인을 해봐야 할 만큼, 백현은 긴장감에 점철되어 있었다. 아마 조금만 더 오래 그가 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면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을 것이다.

 

“미안한데,”

그러나 제 행동을 바라본 찬열이 곧바로 입술을 열었을 때는 다른 의미로 철렁, 가슴이 내려 앉았다. 낮은 목소리가 쿵쿵 제 심장 박동에 맞춰 울리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 다음엔, 그가 뱉은 단어의 뜻이 거절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한번 더 철렁. 가슴이 내려 앉았다. 

 

“나도 신청하러 온 거라.”

눈을 깜빡이며 그의 말 뜻을 느리게 해석하고 있는 제가 답답할 법도 할 텐데, 그는 웃으며 제 목을 긁적이고는 ‘일단 이거 작성해서 내야 해.’ 상냥한 말을 덧붙였다. 제가 들고 있는 A4용지를 가리키는 손에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내렸던 백현이 그제서야 그의 말 뜻을 깨달은 듯 화들짝 놀라 ‘아, 죄송합니다.’ 바보 같은 사과를 뱉어냈을 때에도, 그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괜찮아. 상냥한 인사를 건내는 사람이었다. 그 맑은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뒤에서 였나?

 


물론 백현의 머릿속으론 곧바로 쪽팔려서 어떻게 신청을 하지. 동아리는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따라붙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찬열은 그저 지나치게 잘생기고 지나치게 성격이 좋아 보이는 남자 사람일 뿐. 그의 외모보다 제 실수가 더 크게 와 닿을 때였으니까.


“어느 파트 신청할 거야? 노래? 아니면 세션?”

그러나 붙임성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난처해 하는 제 얼굴을 알아본 것인지. 저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찬열에게는 완전히 두 손을 들고 멍하게 어.. 피아노..? 같은 대답이나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따라, 입부 신청서를 내서는 안되는 거였다.

 

“너 손가락 진짜 예쁘구나.”

하는 말에 얼굴을 붉혀서는 안되는 거였다.




 



 




동아리라는 것이 무언가. 새내기 백현에게 그곳은 대학 생활의 작은 로망이었고, 드라마 같은 환상이었으나, 현실이란.. 언제나 시궁창인 법. 동아리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의 또 다른 ‘술자리’ 모임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백현은 술이 약했다. 몸이 약한 것은 아닌데, 알코올 분해 성분이 없는 몸으로 태어난 것인지. 한잔을 마시면 온 몸이 빨개지고, 두잔을 마시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힘이 쭉 빠지기 시작해서는, 세 잔을 넘어가면 ‘치사량’이라 말해도 절대 이상하지 않은 것이 바로 백현과 술의 관계였다. 그러니 ‘동아리’란 백현에게 이 술과도 같은 것이었다.


처음 입부 신청서를 내러 갔던 날에는 얼굴이 빨개졌고,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때는 온몸의 힘이 쭉 빠지기 시작했으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하면, 제 두 번째 동아리 활동은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 동아리=술.



 

신입생 환영회, 여기저기 어디를 가나 제가 새내기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것만 같은 4월의 어느 날. 가입을 하고 몇 번을 나가지 않던 동아리에서 단체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를 한다는 짤막한 안내와 함께 ※전원 참석※ 이라는 단어가 쿡, 쿡, 제 눈을 파고 들어온 것이다. 같은 기수의 동기들은 물론 선배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자리는 저에게 매우 위험한 자리라는 것은 물론 잘 알고 있었지만, 백현은 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나갔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아는 사람이 없는 자리는 어색했다. 보이는 사람이 누구건 허리를 숙여서 인사했다. 선배들의 얼굴도 아직 익히지 못했던 탓에 동기와 선배를 구분해 내는 것이 어려웠다. 워낙 사람의 관계에 눈치가 빠르고 서투름이 없는 편이라 어딜 가나 예쁨을 받긴 했지만, 첫 만남 이라는 것은 늘 어려웠다.

 

“어, 36기 ! 뭐해~ 서있지 말고 앉아.”

 

나. 35기 이다은. 반갑다? 그녀의 인사에 다시 고개를 숙이며 제 소개를 했다. 그녀는 저를 소파로 데려가 앉히며, ‘앞으로 누구를 만나든 36기 누구다- 인사를 해야 쓴 소리를 안 먹는다’는 팁을 살며시 던져주고는 다시 휙 하니 사라졌다.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그녀의 등을 잠시 바라보던 백현은 킁, 작게 코를 먹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를 포함한 36기 동기들은 아직 3명 뿐이었다. 백현은 그들과 인사를 나누며 긴장을 풀어보려 노력 중에 있었다. 왠지 모르게 자꾸만 손에 땀이 찼다.

 

사실 백현은 조용한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까불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좋게 말하면-활발한 쪽에 속했다. 그러나 워낙에 낯가림이 심한 데다 새내기 특유의 이미지 관리가 한창인 요즘의 백현은 고등학교 친구들이나 집에서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아마 지금의 제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뒤통수를 얻어맞을 것이다. ‘미친놈아! 토 나와-’ 하고, 

그렇게 조용히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던 백현은 문이 열림과 동시에 다시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녕하세요!!”

문을 열자마자 큰 소리로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발견하며 백현은 아주 조금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누구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선배는 아닌 것 같으니 허리를 숙이지는 않았다. 그를 바라보며 다시 소파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붙이려 할 때. 그가 저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 지더니, 

 

“어, 키보드!”

소리쳤다. 백현은 그 엄청난 발성을 뿜어내는 목소리에 아주 조금 놀라 네? 그 자세 그대로 동작을 멈추며 물었다. 그가 저와 같은 동기인지, 아니면 저보다 선배인지 가늠을 하기가 힘들어서 어설픈 존댓말을 뱉어내며.

 

“아, 나 선배 아냐. 36기야!”

그는 제 멍청한 표정을 바라보며 훅 가까워 지더니, 반가운 얼굴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 어..”

“내가 너 진짜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아. 반갑다. 진짜. 난 김종대. 우리 키보드는 이름이 뭐야?”

그는 이상한 말을 늘어놓으며 제 소개를 간단히 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악수라도 하자는 것인가,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어설프게 손을 뻗으니 그가 제 손을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난 변백현 .. 그런데, 무슨 키보드?”

“내가 오디션 날 너 키보드 치는 거 봤거든. 근데 이름을 몰라서- 계속 그렇게 불렀다. 쏘리-”

그는 저의 질문에 동아리 오디션 날 제가 연주하는 걸 보았고, 곧바로 제 차례를 기다리느라 인사를 건내지 못했다며 아쉬운 표정을 해 보였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사과에는 손사래를 쳤다. 뭐, 그런 걸 가지고. 괜찮다는 말을 덧붙이니 종대는 씨익- 시원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우리 백현이 성격도 좋네-, 마치 인상이 좋으시네요.. 하고 다가서는 사람들처럼 자연스레 제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래서 말인데, 백현아.. 키보드 좀 쳐주지 않을래?” 

 

그때 왜 거절하지 못했을까 백현은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 거절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한다.

 

 

“어! 박찬, 여기 여기-!”

“일찍 왔다?”

“고롬- 내가 또 한 빠름 하지. 야야, 그것보다 내가 드디어 오늘, 우리 키보드 님을 찾았다는 거 아니냐! 으하핫, 인사해. 백현아. 이쪽은 우리 기타!”

익숙한 목소리라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어깨가 굳어진 것은 당연했다.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 또한 지나치게 익숙해서, 겨우 두 번째 만남인데 어째서 이렇게 제 뇌리에 콕 박힌 듯 선명한 것인지는 설명할 길이 없지만.

 

“어. 백현이..가 그 키보드였어?”

저를 바라보는 동그란 눈을 마주하며 아주 잠깐, 숨을 들이마시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뭐야, 너 백현이 알아?”

“우리? 구면이지.”

“뭐야! 어떻게 알아! 야, 알고 있었으면 빨리빨리 알려 줬어야지 - 잇짜식!!”

찬열의 팔을 툭툭 내려치는 손을 바라보며 백현은 눈을 깜빡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는 아, 야. 아파. 그만 때-려. 찰지게 날아드는 손을 오른손으로 밀어내며 멍하니 앉아있는 제 앞으로 왼손을 흔들어 보였다. 

 

“괜찮아 백현아? 너무 폭력적인 장면을 봐서 애가 놀라잖아. 김종대.” 

“왜, 뭐! 헐. 백현아. 놀랐어?”



차라리 술을 먼저 마셨더라면, 


그 날의 기억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

이번 연재는 비축분 없이 조금 짧게 자주 들리려고 해요..! (저의 희망사항 입니다.)

꿈속에서 그댈 만날수 있다면 좋겠어

우주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12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15
|찬백| 선을 그어 주던가 一
#17
|찬백| 선을 그어 주던가 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