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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백| 호우주의보 번외 - THE DAY

+CB. first snow








평일 오전, 백현은 일어나자 마자 샤워를 하고 옷을 대충 챙겨 입었다. 

 

“백현아?”

 

티셔츠 안으로 머리를 밀어 넣으며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 후다닥 소리가 날 듯 빠르게 옷을 꿰어 입고 침대 위에서 눈을 꿈벅이는 찬열을 마주했을 때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 올려주기까지 했다. 

 

“저 때문에 깨셨어요? 아직 새벽인데..”

 

조금 더 자도 돼요. 잠결에 제 팔을 잡아오는 찬열의 손을 슬그머니 피한 백현이 잠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는 그의 등을 잠시 토닥이다 방을 빠져 나왔다. 평소 같으면 찬열보다 늦게 일어나 잠 투정을 하는 것은 제 쪽일 테지만 오늘 만큼은 절대 늦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탓에 백현의 움직임은 평소와 달리 조금 분주해 보였다.   

 

냉장고 깊숙이 숨겨둔 -사실상 찬열의 눈을 피해 숨겼다기 보단 그가 모르는 척 해준 것이 맞을 테지만- 봉투를 꺼내든 백현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며 소음을 만들어 낼 때마다 슬쩍 문 앞을 바라보며 확인하길 여러 번, 

 

“후..”

 

국자를 휘저으며 이마 위로 맺힌 땀을 슥 닦아낸 백현이 낮은 한숨을 뱉어냈다. 간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 다시 침실 문을 살피고 서둘러 국자를 휘젓기를 몇 번, 불 앞에 서있어서 땀이 나는 것은 아니고 요리라고는 아직도 굽기 이상의 레벨을 구사하지 못하는 제가 아침부터 불 앞에 서서 무려 ‘국’을 끓이고 있는 지금의 상황 자체에 이마 위로 땀이 송글송글- 베어 나왔기 때문이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8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곧 찬열이 깨어날 시간이었다. 그가 눈을 뜨기 전까지 모든 것을 끝내려던 백현은 서둘러 테이블을 닦고 상을 차렸다. 밥솥을 열어 김이 피어오르는 밥통 안을 휘적이고 다시 닫은 백현이 국 그릇을 꺼내 들었을 때였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나 했더니.”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백현이 어깨를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찬열은 어느새 그의 등 뒤로 다가와 백현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반쯤 잠에 취한 눈을 꿈뻑이며 백현의 어깨 위로 턱을 걸친 찬열이 그의 목 언저리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마셨다. 간지러운 느낌에 몸을 비트는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백현은 아직도 이런 스킨십에 약한 편이었다.

 

“..안 들키려고 했는데.”

 

등을 토닥여 재우고 나온 것이 무색하게 평소처럼 잠에서 깨어난 찬열이 야속하긴 했으나 알고 있으면서도 못본 척 기다려준 것이 고마웠던 백현은 더 이상 불평을 늘어놓지는 못했다. 뭐.. 어차피 국만 뜨면 상차림은 끝난 상태기도 했고. 

 

“맛있는 냄새 나서 깼어.”

 

잘 잤어? 아침 인사를 침대가 아닌 주방에서 나누는 것은 오랜만인지라 백현은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깨지 못한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며 몸을 반쯤 틀어 그를 마주했다. 


“맛..”


졸음이 가득 들어찬 눈을 슬쩍 뜨며 저와 눈을 맞추는 찬열의 시선에 아주 잠깐 제가 하려던 말을 잊었지만.

 없을 텐데.. 요리가 직업인 사람 앞에서 맛의 평가를 논하기는 그렇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못 먹어줄 정도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만든 것이었기에 백현은 결국 뒷말을 삼키며 물을 틀었다. 

 

“씻고 오세요.”

“응.”

 

착실히 대답을 한 것과는 다르게 찬열은 여전히 제 허리에 둘러진 팔을 풀어내지 않고 있었다. 백현은 그릇의 물기를 털어내며 잔뜩 뻗쳐있는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몇 번 더 눈을 깜빡인 찬열이 가는 어깨 위로 입을 맞추고 팔을 풀어냈다. 백현은 싱크대 위에 그릇을 내려두고 등을 돌려 찬열을 마주하며 웅얼거렸다. 손 젖었는데.. 

 

“괜찮아.”

 

제 목소리에도 여전히 머뭇거리는 젖은 손을 끌어당긴 찬열이 차가워진 손 끝을 어루만지며 미간을 좁혔다. 젖은 게 문제가 아니라 차가운 게 문제인데. 묘하게 제 시선을 피하는 백현을 잠시 바라보던 찬열이 잔뜩 굽혔던 몸을 일으키며 백현의 팔을 제 등 뒤로 두르고 턱을 머리 위로 대며 말했다.

 

“데려다 줘.”

 

백현은 저를 온전히 품 안으로 끌어 당기는 온기에 놀랄 틈도 없이 제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목소리에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어디를? 되묻지 않은 것은 아주 잠시 뒤에 그가 말한 행선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늘 저보다 먼저 눈을 뜨던 찬열은 완전히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비틀거리는 저를 이끌어 욕실 안으로 안전하게 데려다 주고 칫솔 위로 치약을 길게 짜서 제 손에 쥐어주곤 했으니까.

 

“안 데려다 줄 거야?”

 

백현은 오늘 그가 작정을 하고 어리광을 피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이렇게 한번 씩 평소에는 보기 힘든 그의 모습을 볼 때면 백현은 손 끝을 말아 쥐고 잠시 숨을 가다듬는다. 그의 곁에 있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아서,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그의 온기와 향기를 언제든지 빼앗길 것만 같은 두려움이 손 끝에서부터 아주 조금씩 밀려드는 기분을 느낀다. 

 

“백현아.”

 

그러나 그런 저를 깨우는 것은, 다시 현실로 이끌어 내는 것은 언제나 찬열이다. 대답이 없는 저에게서 몸을 물리며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백현은 고개를 들었다. 저를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온전히 제가 담기는 것을 바라보던 백현이 느린 숨을 뱉어내며 그의 품 안으로 다시 안겨들었다. 찬열은 그런 제 등을 쓸어 내리며 낮게 웃는다. 그는 더 이상 이런 제 행동에 놀라지 않는다. 제 손을 흠뻑 적셨던 물기가 그의 옷 안으로 전부 스며든 뒤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짙은 회색빛의 등을 거울 안에서 마주했을 때였다. 

 

저를 안은 채 뒤뚱 뒤뚱- 불편한 걸음으로 욕실로 들어온 찬열이 욕조 끝에 걸터앉으며 제 손을 잡아 끌었을 때, 백현은 말없이 그의 앞으로 다가서 그의 다리 위에 앉았다. 그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은 찬열이 제 어깨에 기댄 작은 머리통을 쓸어 내리며 속삭였다. 

 

“샤워 했어?”

“..”

 

백현은 결국 얼굴을 잔뜩 붉힌 채로 욕실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닫힌 문 너머로 억울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대꾸도 않고 주방으로 다시 걸음을 옮긴 백현은 이미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채 였다. 쿵쿵- 거칠게 내딛는 발소리에 맞춰 심장이 크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백현은 제 귓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울리는 듯 했다. 백현은 싱크대에 몸을 기댄 채 한숨을 뱉어내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머릿속에 가득찬 생각을 털어낼 모양으로, 

 

백현은 제 앞에 놓인 그릇의 물기를 털어내며 다시 한 번 냄비 뚜껑을 열었다. 맛있기를 바라진 않았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욕실을 벗어난 찬열의 젖은 기운에 백현이 흐응 숨을 내뱉으며 손끝으로 툭툭 습관처럼 시계 위를 두드렸다. 그가 식탁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백현의 등을 바라봤지만 백현은 모르는 척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국 그릇을 식탁 위로 올리고 돌아섰다. 그가 주걱을 들고 밥통을 열었을 때 식탁에서 찬열의 목소리가 울렸다. 

 

“.. 백현아.”

“네?”

 

백현은 밥 공기를 들고 자리에 앉으며 제 이름을 부르는 찬열을 바라봤다. 그런 제 시선에도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백현은 조금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은 제 이름을 부를 때부터 제가 그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지금까지 쭉 국 그릇 위에 멈춰있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일까 백현은 그의 국 그릇과 그를 번갈아 바라보며 밥 공기를 그의 앞으로 내려주었다. 제 움직임에 찬열은 그제서야 제가 자신의 앞에 앉아있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고개를 들어 올려 저를 마주했다.

 

“아..”

 

그와 눈이 마주친 백현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오늘, 며칠이지?”

“네?”

 

백현은 그제서야 찬열이 고개를 갸웃하며 식탁 위와 저를 번갈아 바라보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마 제 생일이라는 자각을 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제 자신의 일에 대해선 꽤나 무관심한 남자였으니까..

 

백현은 잠시 말없이 그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의 동그랗고 까만 맑은 눈동자를 마주한채 한숨 같은 웃음을 토해내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요.”

 

아마 이런 인사를 받게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찬열은 제 목소리를 듣고도 두어 번 눈을 깜빡일 뿐 답이 없었다. 누군가 제 생일이라고 아침 상에 뜨거운 미역국을 끓여 주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던 탓이다.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찬열을 보며 백현은 다 식겠어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숟가락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쥐어줄 참이었다. 그러나 제 손은 그의 앞으로 뻗어지기 무섭게 본래의 목적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어제부터 분주했구나.”

 

백현은 제 손을 잡은 커다란 손가락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하고 나니 그의 말대로 첩보 영화처럼 재료를 숨겨두느라 분주했던 어제부터 오늘 아침 혼자 몰래 미역국을 끓인 순간까지의 일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작년에도 그냥 지나갔잖아요.”


아직도 삐진 기색이 역력한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에 찬열은 낮게 웃었다. 작년 자신의 생일에는 준영을 선두고 단체로 놀이동산을 가게 되었던 터라 뒤늦게 그의 생일을 알게 된 백현이 정작 생일의 당사자인 찬열보다 더 서운해 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라서 였다. 평소 같으면 화를 내기는커녕 삐쳤다는 기색조차 저와 눈을 맞추면 얼마 못 가 풀어지던 백현이 집에 오는 내내 말 한마디 없었다는 것도 찬열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사실 찬열이 이렇게 까지 놀라는 이유를 백현도 알고는 있다. 지금까지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해준 기억이 얼마나 될까 백현은 물론이고 찬열도 마찬가지 겠지만, 백현은 더더욱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생일은 고사하고 자신의 생일조차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던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생일을 축하하고 축하 받고 선물과 케이크를 주고 받는 일도 없었다. 당연히 누군가의 생일을 챙겨주고 축하해준 기억도 마찬가지 였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던 백현은 작년 찬열의 생일에 준면과 종인, 영호와 동수, 성철과 준영, 준영의 엄마인 서은과 하준 내외 그리고 얼떨결에 휴가를 받은 세훈까지 모두 함께 갔던 놀이 공원에서 


“오늘 박찬열 생일이잖아. ..몰랐어?” 


준면의 말을 시작으로 선물까지 준비한 종인과 하준을 보며 처음으로 누군가의 생일을 ..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그 누구도 아닌 찬열의 생일을 저만 모른 것 같은 기분이 이렇게 까지 기분이 나쁠 줄은 몰랐던 탓에 하루 종일 제 옆으로 다가오는 찬열을 피해다녔다. 그러나 백현이 왜 화가 났는지 조차 눈치채지 못한 찬열은 준영과 손을 잡고 자신을 피해 놀이 기구만 타러 다니는 백현의 태도보다는 그 파리한 안색을 보며 걱정만 한가득 늘어 놓고 있었을 뿐이었다. 

 

해가 떨어지고 여기저기 화려한 불빛들이 물들어 갈 때쯤, 보다 못한 준면이 저와 찬열을 관람차 안으로 밀어 넣었을 때는 비로소 울음을 터트릴 지경이 된 후였다. 

 

“..백현아.”

 

제 맞은 편에 앉아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손잡이를 꽉 쥐고 창밖만 바라보던 백현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을 때, 찬열의 표정이 어땠는지 백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기 바빴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저를 피해 다녔던 것이 괘씸하지도 않은지 찬열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백현은 왠지 모를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볼을 타고 흘러 내리는 눈물을 비벼 닦기 바빴던 백현은

 

“무서워서 그래?”

 

눈치 없는 찬열의 말에 결국 소리를 내어 울음을 터트려야 했다. 

 

“허엉..”

 

갑자기 커진 울음 소리에 놀라 서둘러 자리를 옮긴 찬열이 제 눈을 가리며 아래 보지 말고, 이리와. 잔뜩 웅크리고 있는 어깨를 끌어 안아 제 품으로 당겼을 때조차 백현은 눈물을 삼키지 못했다. 왜 그렇게 속이 상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물론, 제가 타고 있던 관람차의 높이가 점점 올라가 사람들의 모습이 -거짓말 조금 보태서- 개미만 하게 보이는 지금의 상황 자체도 무서웠던 건 사실이지만.

 

 

백현은 집에 돌아올 때까지도 자신이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하루 종일 찬열을 피해 다니느라 잘 타지도 못하는 놀이기구를 연거푸 타던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온 듯 잔뜩 지친 얼굴을 한 백현이 여전히 제 눈치를 살피는 찬열의 품에 힘없이 안기고 나서야 겨우 속마음을 털어 놓았던 것은 그제서야 제 마음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찬열.”

 

얼마나 어려운 말이기에 이렇게 망설이며 몇 번이나 숨을 토해냈다 삼키길 반복하는 것인지 찬열은 저에게 기대오는 작은 등을 토닥이며 가만히 기다려 주었지만, 백현은 몇 번이나 다시 말을 뱉었다 삼키며 그의 품에 몸을 웅크리고 파고들기 바빴다. 

 

“생일..축하해주고 싶었는데.”

 

한참 후에야 제 품 안으로 쏟아진 목소리와 숨, 제 옷을 꽉 틀어 쥔 손가락을 내려다본 찬열은 결국 그 작게 오므라든 손을 펴서 가는 손가락 위로 입을 맞추며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제 품 안의 떨림과 온기 어느 것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어서 찬열은 스스로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백현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맞추며 동그란 이마 위로 감긴 눈동자 위로, 붉어진 뺨 위로, 제 아랫 입술을 우물거리는 작은 입술 위로 입을 맞추기 바빴다.

 

“저, 지금. 진지-”

 

그런 제 행동에도 몸을 비틀며 미간을 찌푸린 백현은 제 말은 하나도 듣지 않는 것 같은 찬열의 얼굴을 밀어내며 단호한 말투로 얘기했지만 그마저도 완전한 문장으로 끝내지 못하고 뜨거운 숨이 되어 부서져야 했다.  

 

그 날의 일은 아직도 찬열 뿐만 아니라 백현 자신에게도 꽤나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니 아침 잠도 많은 백현이 그의 생일 아침 알람도 없이 눈을 떠 미역국을 끓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오늘은 두 사람 다 각자의 스케줄이 있는 평일이었다. 찬열은 가게로 백현은 학교로 출발하면서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백현은 매일 저를 위해 아침을 해주던 찬열을 대신해 오늘은 꼭 제가 먼저 일어나 아침상, 아니 정확히는 생일상을 차려주고 싶었다. 

 





“무슨 좋은 일 있냐.”

 

강의실에 앉아 있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오늘 아침 찬열의 벙찐 얼굴이나 저를 바라보던 눈동자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얼굴 표정을 무너트리고 있던 백현은 놀란 얼굴을 하고 제 옆자리를 돌아봤다. 

 

“아, 어. 아니.”

 

마치 그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저라는 것도 그제서야 깨달은 사람처럼 저를 빤히 바라보는 백현을 보며 경수는 익숙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그냥.. 말 끝을 흐리는 백현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그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백현은 큼, 헛기침을 뱉어내며 제 표정을 갈무리하려 노력했다. 뭐 경수의 입장에서는 -아침부터-계속 헤벌쭉한 표정으로 일관된 것처럼 보였겠지만.. 차라리 좋은 일이 있다고 대놓고 말을 하지. 이미 찬열과도 두어 번 마주쳤던 경수는 백현이 이런 얼굴을 할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저에게서 빗겨간 관심에 내심 안도하며 노트 위로 시선을 떨어트린 백현은 오늘은 찬열이 데리러 오기 전에 먼저 가게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펜 끝을 톡톡 두드렸다. 






강의가 끝나갈 무렵 어느새 조금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백현은 고개를 기울였다. 회색빛에 가까운 하늘은 곧 비라도 쏟아질 모양이었다. 가방을 고쳐 매고 건물 밖으로 나온 백현은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놀라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가 

 

“백현아!”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익숙한 목소리는 화면 위로 떠오른 ‘종인이형’의 목소리였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타- 집에 데려다 줄게.”

 

백현은 아주 잠깐 제가 준면에게 했던 말이 종인에게는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심스러운 제 표정을 마주한 종인이 웃으며 방해할 생각 없으니까 타. 익숙하게 저를 다루는 탓에 하는 수 없이 그의 차 안으로 올라탔다.

 

“형님한테 얘기 들었어. 오늘은 단 둘이 있겠다고 했다며-”

“..그런거 아니에요.”

 

아니긴, 어깨를 으쓱이며 뒷 말을 삼킨 종인이 차를 출발 시키는 동안 안전벨트를 맨 백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준면에게 이번 생일에는 제가 축하해드리고 싶다는 말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이렇게 까지 말이 와전될 줄이야..

 

“걱정하지마. 방해할 생각 없으니까- 그보다 나는, 선물을 더 준비한 거라고?” 

“선물이요?”

“그래. 원래 선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냐.”

 

 



 

 

 



“형!!!”

 

가게로 출근한 종인은 홀이 떠나가라 소리를 내지르며 찬열을 불렀다.

 

“..가게 무너져요. 사장님.”

“형 어딨냐,”

“주방이지 뭘 당연한 걸..”

 

묻고 그러신대. 퉁명스런 목소리로 이어지는 뒷 말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세훈을 지나쳐 주방으로 향한 종인은 다짜고짜 찬열의 모자와 에이프런을 잡아 뜯은 뒤 그를 주방 밖으로 몰아냈다.

 

“뭔,”

“형 얼른 집에 가봐. 백현이 지금 집에 있어.”

“집? 백현이가 ㅇ.. 밀지 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등을 미는 종인을 내려다본 찬열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러자 종인은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밀리지도 않으면서 뭔 소리야.. 중얼거렸다. 

 

“백현이 내일 수업 없다며 그러니까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세요-”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았는데.”

“내가 방금 백현이 집에 데려다 주고 왔으니까?”

“..”

 

아.. 종인은 방금 제가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었으나 이미 찬열의 손, 아니 주먹이 제 머리를 강타한 뒤였다. 제 머리를 두 동강 낼 듯, 풀파워로 내리치고 사라진 찬열의 뒷모습을 째려보며 제 머리를 두 팔로 그러 안았다. 

 

“아우씨!! 무식한 양반.”

“사장님이 맞을 짓을 골라서 한다는 생각은 안 해봤죠?”

 

형 생일 한 번 챙겨주려 다가 졸지에 맞을 짓만 골라서 한 어른이 된 종인은 억울함을 감추지 못하고 퇴근 시간까지 세훈을 괴롭혔다는 후문이 돌았다.

 



 


차에 올라 탄 찬열은 제가 생각해도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속력을 내며 집으로 향했다. 누군가 시킨 적도 없는데 어느샌가 당연하게 제 하루 일과처럼 이루어지던 일. 백현을 데려다 주고 데려오던 하루의 유일한 낙을 빼앗긴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 

 

거칠게 차를 몰던 찬열은 집 근처에 다다라서 점점 하얗게 변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멈칫했다. 신호에 걸려 멈춰있던 중이 아니었다면 아마 위험할 뻔 했다고 생각하며 핸들을 고쳐 잡은 그가 느리게 숨을 뱉는 순간 제 시야에 떨어져 내리는 하얀 눈송이를 발견했다. 

 

“아..” 

 

백현아.

찬열은 탄식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백현아..”

 

그의 말이 소리가 되어 나왔을 때 백미러로 깜빡이는 불빛이 보였다. 어느새 빨간 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뀐 모양이었다. 서둘러 차를 출발 시킨 찬열이 핸들을 틀었다. 이 커브만 돌면 아파트 단지 입구였다.

 

“비 와요??”

 

종인에게서 찬열이 출발했다는 메시지를 받은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제 바로 옆에서 들리는 선명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린 백현은 그의 목소리에 반가운 마음과 그가 지금 운전 중이라는 생각이 교차하며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운전 중에 비라도 오면 큰일인데.. 서둘러 창가로 다가선 백현은 창문 위로 달라 붙자 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눈꽃을 바라보며 입술을 벌렸다. 

 

“아..”

 

탄식 같은 숨이 창문 위로 하얗게 맺혔다. 

 

올 겨울, 첫눈 이었다. 

 


 



타닥타닥-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온 백현은 제 예상보다 조금 더 추운 공기에 숨을 들이마시며 어깨를 움츠렸다. 어디지.. 불빛이 들어오는 차도를 따라 시선을 돌리며 찬열의 모습을 쫓던 그의 시선 끝에 익숙한 차량이 들어찼다. 다행히 거의 다 와서 눈이 내린 모양이다. 

 

“찬열.”

 

주차를 하고 차키를 뽑아 든 찬열은 문을 열면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차 앞으로 다가선 백현의 실루엣 위로 하얀 눈이 내려 앉는 것을 보며 찬열은 서둘러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추운데 왜. ..” 

내려왔냐는 말을 끝맺지 못한 것은 제 앞으로 다가선 백현의 머리 위로 귀가 팔랑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리본이었나. 

 

“비오는 줄 알았는데 눈이네요. 올해 첫 눈이죠.”

“눈이 와서 헛게보이나..”

“아.”

 

백현은 잠시 찬열의 시선이 닿아있는 곳이 제 머리 위라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손을 올렸다. 

 

“아. 눈이.. 와서 놀라서.. 그러니까..”

“일단, 이리 와봐.”

 

제 머리 위로 하얀 털의 토끼 귀와 빨간 리본을 어루만지는 하얀 손 끝을 잡은 찬열은 코트 안으로 작은 몸을 끌어 당기며 웃음을 터트렸다. 

 

“눈토끼 같네.”

 

녹으면 안돼. 제 머리 위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백현은 얼굴을 붉혔다. 집에서 있던 차림 그대로 밖으로 뛰어 나온 백현의 어깨를 그러 안은 채 집 안으로 들어온 찬열은 현관문이 닫히자 마자 백현의 몸을 안아 들었다. 

 

“눈은 언제까지 내릴까”

 

아마 지금 그의 눈엔 제가 눈이라도 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백현이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을 맞추며 살포시 웃었다. 

 

“언제까지 내렸으면 좋겠는데요?”

“글세.. 조금. 오래?”

 

조금씩 가까워지는 달콤한 숨에 백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저씨가 원하는 만큼 머물게요. 그의 입술 위로 내려 앉은 하얀 눈꽃송이의 온도는 따스했다. 


부드러운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마주 대고 떨리는 손길로 그의 목을 어루만진 백현의 입술 사이로 막 찬열의 혀 끝이 파고들기 시작할 쯤, 백현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찬열에게서 조금 떨어져 나왔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아. 잠,잠시만요.”

 

강조하듯 재차 뱉어낸 잠시만이란 단어에 조금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긴 했으나 찬열은 제 팔을 잡고 내려 달라는 눈빛을 보내는 백현을 순순히 땅 위로 내려주었다. 후다닥 소리가 날 것처럼 저에게서 벗어난 백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찬열은 아직도 그의 머리 위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토끼 귀와 리본을 보며 어금니를 물었다. 지나치게 귀여운데 .. 이 말을 했다가는 또 부끄럽다며 제 얼굴부터 숨길 백현을 잘 알기에 끝내 뱉지는 못하고 삼켜낸 말이지만, 찬열은 팔짱을 낀 채로 백현의 발걸음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고 있었다. 

 

후다닥 주방으로 향한 백현이 냉장고를 여는 소리가 들리고 아주 잠시 뒤 다시 방 안으로 들어선 백현은 전등 스위치를 내렸다. 어둠속에 남겨진 찬열은 자연스레 그 안의 유일한 빛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는 백현은 손에 들린 작은 케이크를 한 손으로 가리고 제 앞으로 걸어 왔다. 아마 위태롭게 흔들리는 촛불을 지키려는 모양이였다. 

케이크 위로 반짝이는 촛불이 눈에 들어오자 찬열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 나왔다. 안으로 들어온 백현은 그런 찬열과 시선을 마주하며 조그맣게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찬열. 생일 축하 합니다.”


처음 받아보는 생일 케이크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물론 처음 들어보는 노래도 아니었다. 그러나.. 온 마음으로 제 생일을 축하해 준 이는, 지금 제 눈 앞에 서있는 이가 처음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찬열은 생각했다. 

저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미소를 마주하며 찬열은 아주 잠깐 눈 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조용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불러주는 생일 노래는 저를 바라보는 눈빛 만큼이나 따스한 것이었음에 찬열은 마치 촛불 위에 흔들리는 불빛처럼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소원 빌고 촛불 꺼주세요.” 

 

그러나 제 눈앞에서 재촉하듯 케이크를 살며시 흔들며 웃는 백현의 맑은 눈을 마주한 찬열은 또 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촛불 꺼야지.. 소원도 빌고. 그런데 누군가에게 한번도 빌어본 적 없던 내 소원은, 이미 전부 이루어 진 것 같은데 또 뭘 빌어야 할까 백현아..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마른 침을 삼키던 찬열은 결국 제 생각을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하고 촛불을 불어 껐다. 어두워진 시야에 기다렸다는 듯 방 불을 켜는 백현을 따라 시선을 움직일 뿐 찬열은 아주 잠시동안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백현은 옷장 서랍을 열어 작은 상자를 꺼내 들고 다시 찬열의 앞에 다가섰다. 그는 아주 잠깐 아침의 일을 다시 떠올려야 했다. 그러고 보니 제 생일이라고 아침 일찍 일어나 미역국을 끓이고 케이크에 선물까지.. 너무 과하게 생일 축하를 받는 기분이 들었으나 지금에 와서 백현을 말리기엔 조금 늦은 것도 같고. 또 작년처럼 백현을 울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 찬열은 그를 말리지 않기로 했다.

 

“뭘 .. 드리면 좋을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지금도.”

 

찬열은 제 앞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백현의 머리 위 하얀 귀를 어루만지며 낮게 웃었다.


“충분한데,. 백현아.”

“이건 .. 반쯤. 종인이 형 아이디어에요.”

“..알아.”


대충 봐도 알 것 같은데, 이런 짓을 꾸밀 사람은 김준면 아니면 김종인 밖에 없지.. 그런데, 

반 쯤이라면.. 나머지 반은?

 

“.. 제가. 음. 제가 준비한 건 이거에요.”

“또?”

“지난 번엔 그냥 지나갔잖아요..”

 

잔뜩 아쉬운 표정을 하며 두 손으로 매만지던 상자를 건네는 백현의 행동에 찬열은 잠시 고민을 하다 그 상자를 받아냈다. 


“고마워.”

“그리고..”

“그리고?”

 

더 이상 선물은커녕 기다리기도 힘든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현은 자꾸만 저에게 잠시만, 잠시만. 브레이크를 걸었다. 못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니 백현은 아주 조금 뜸을 들이며 제 손끝을 어루만지더니 머리 위에 묶인 빨간 리본을 슬쩍 매만지며 말했다.

 

“제가 선물이에요. 찬열씨..” 

 

진짜, 미치겠네. 손에 힘이 들어가 저도 모르게 상자를 구긴 찬열의 손 끝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백현의 머리 위, 정확히는 하얀 털로 만들어진 귀가 정말 쫑긋- 거리는 듯 보였다. 

 

“..그거, 좀. 이상한데.”

 

아니. 좀.. 위험한데. 백현아. 

 

“.. 죄송..해요. 벗을게요.”

 

찬열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인 백현이 서둘러 제 머리 위로 손을 뻗어 토끼 귀-머리띠-를 손으로 잡았다. 방금 마주한 찬열의 눈빛과 이상한데.. 여전히 제 귓가를 울리는 말을 되뇌이며 아이디어를 낸 종인을 원망하던 백현은 제 손을 잡는 손길에 놀라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벗으라는 말은 아니고.”

 

저와 눈을 맞추며 얘기하는 목소리에 움찔 몸을 떤 백현의 손이 굳은 듯 멈추자 찬열은 그 작은 손을 잡아 내렸다. 

 

“이거 조금 있다가 풀어봐도 될까? 지금 좀, 참기 힘든데.”

“..네?”

 

제 말에 잠시 눈을 깜빡인 백현은 아마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다. 

 

“찬,”

 

그러나 이 이상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걸 보고 불가항력이라고 하지 않으면 또 무얼 불가항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찬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백현을 다시 안아 들고 저를 바라보며 동그랗게 커진 눈을 마주하며 웃었다. 

 

“제일 큰 선물부터 좀 풀어보고.”

 

저를 보며 웃는 얼굴을 내려다보던 백현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었다. 호를 그리는 두 입술이 맞물리며 촉촉 간지러운 소리를 만들어냈다. 혀 끝이 닿았을 땐, 백현의 팔이 찬열의 목으로 백현의 다리가 찬열의 허리로 착 달라 붙듯 엉겨 들었다. 서로를 그러 안은 단단한 팔과 온기는 첫 눈이 내리는 계절마저 잊은 듯 따뜻했다. 

 

온 세상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던 밤,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나눴다.



 


하얀 이불 속에 푹 파묻힌 하얀 어깨 위로 입맞춤을 한 찬열의 숨이 백현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에게 기댄 자세로 앉아 있던 백현은 제 머리 위로 움직이는 손동작에도 가만히 몸을 맡긴 채였다. 하얀 피부 위로 쿵쿵 발자국처럼 남은 빨간 자국들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다. 토끼가 도망을 간 모양인지 백현의 머리 위에 있던 복슬복슬한 하얀 털의 토끼 귀와 리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이거 열어봐도 되?”

 

제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백현은 리본을 풀어내는 손끝을 보며 괜스레 긴장을 한 듯 두 손을 모으고 이불 끝을 꼬집듯 비틀고 있었다. 찬열은 그 작은 손동작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웃으며 상자를 열어 안을 확인하고는 백현의 귓가로 입을 맞추며 말했다.

 

“같은 브랜드네.”

 

백현이 그의 선물로 고른 것은 제가 그에게 선물 받았던 시계와 같은 브랜드의 회중시계였다. 요리를 하는 그는 손에 물을 묻히는 일이 많았다. 당연히 시계는 잘 차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꼭 시계를 주고 싶었던 이유는 어쩌면 백현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게 된 후로 언제나.. 제 시간을 그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제 바램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시계는 잘 풀어두니까..”   

 

회중 시계는 디자인이 많지 않았다. 제 것과 최대한 비슷한 디자인을 찾느라고 애를 먹었다. 같은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예쁘네.”

 

상자 안에서 시계를 꺼내 손 끝으로 매만지던 찬열은 제 품 안에 가득 안겨있는 백현의 체온이 그의 등 뒤로 느껴지는 목소리의 울림이나 빠르고도 잔잔한 심장 소리가 사무치게 좋았다.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

 

“..그쵸.”

 

제 말에 느리게 답을 뱉어내는 목소리를 들으며 찬열은 보드라운 머리칼과 볼 위로 입술을 내리며 숨을 들이마셨다. 달콤한 내음이 폐부로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은 그가 조금더 꽉 그를 품 안으로 끌어 당겼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을 언제 들어보았더라..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미디어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빼어난 외모, 예술 작품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사람들. 단지 외모가 아닌 성품이 고운 사람들. 미의 기준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저도 평범하게 예쁜 사람이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것이 단지 누군가를 특정 지을 수 없었을 뿐.

그러나 지금의 제가.. 이 아이를 빼놓고 예쁘다는 말을, 아름답다는 말을 떠올릴 수 있을까.. 찬열은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일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알에서 깨어난 어린 새처럼 제 감정을 따라 흘러 온 것은 백현이 아니라 제 쪽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오래 전에 깨달았을 지도 모른다.

 

“백현아.”

 

백현아.. 그 이름을 부르며 


“네? ..?”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면서 

 

“찬열?”


제 이름을 부를 때나,

 

“이거 마음에 안 들어요?”

 

그 작은 손이 저를 잡아 왔을 때.

이미 저는 송두리째 휩쓸려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주는 온전한 사랑에 휩쓸려 버린 것은 제 쪽이다.

 

“예쁘다.”

 

반짝이는 눈동자. 동그란 코, 부드럽게 호를 그리는 입술. 발그레한 뺨. 그 위로 작은 점들 하나하나 까지도.. 어느 것 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다. 

 

“너. 백현아. 너 예쁘다고.”

“..”

“방금. 오글거린다고 생각했지.”

“..큼. 조금..요.”

 

눈썹을 찡그리며 시선을 피하는 백현을 바라보며 찬열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알아. 오글거리는 거. 맞아. 진짜 오글거리지.. 

그런데,

근데 백현아. 


“그래도. 말 하고 싶은 걸 어떻게.”

 

그런 표정을 하고 바라봐도 진짜로 예쁜 걸 어떻게. 너의 모든 게 좋은 걸 어떻게. 내가 널 어떻게 할까 백현아.. 

 

“처음으로 생각한 건데 ..”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드는 생각이 맞을 것이다. 

 

“태어나서 참 다행이다.”

 

태어나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 그래. 찬열은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품게 되었다. 제게 주어진 삶은 살아오면서 제 존재의 이유, 가치, 그 어떤 것도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고 찬열은 확신한다. 

이렇게 온전히 제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제 품에 가득 안고 속삭이는 지금의 이 순간이 없었다면, 영원히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찬열..”

 

아저씨.. 저를 부르며 제 품 안에 안겨오는 따스한 온기와 이제는 익숙한, 하지만 단 한순간도 그립지 않은 순간이 없는 이 달콤한 향기에 코를 묻으며 찬열은 탄식했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요.”

 

찬열은 순순히 인정했다. 

제가 먼저 과거로부터 벗어나 오늘을 살자고, 내일을 살아가자고 혼자 남겨진 백현을 데리고 세상으로 나가고자 했던 것. 함께 만드는 미래를 꿈꾸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저 혼자만의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찬열은 알게 되었다. 

 

구원 받는 것은 언제나 나약한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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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 Cㅏ뇨 B-Day 축하해.

아프지말고 항상 행복해야해 🥰 


생일 글 꼭 쓰고 싶었어요.. 꼭 호우주의보로 쓰고 싶었어요. (찬파 가신 분들 부러우니까 난 글이나 찐닷.. 흙흙..)

꿈속에서 그댈 만날수 있다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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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찬백| 호우주의보 epilog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