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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백| 호우주의보 19

呼偶주의보 | 레인버스+느와르


*warning _ roman noir

 



 

 



사무실을 그만둔-준면이 잘랐다.- 백현은 새로운 알바로 과외를 시작했다. 한국대 법학과라는 타이틀이 붙자 과외비가 웬만한 알바비보다 괜찮았기 때문이다. 백현은 주말에 하나, 주 중에 두 개 과외를 하기로 했다. 새학기가 시작되고 찬열의 몸이 괜찮아지고 나면 더 늘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집을 구해 나갈 필요는 없었고 빚도 없어졌다지만 모아뒀던 돈을 등록금으로 내고 나니 통장이 텅 빈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백현씨 어서 와요~ 준영아! 선생님 오셨다.” 

“네에-!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는-특별 케이스로- 올해 여섯 살이 된 준영이가 있다. 성철의 아들인 준영은 엄청나게 밝은 성격의 소유자로, 백현에게 공부를 배우는 대신 핵.인.싸 되는 법을 전수 중에 있다. 

 

“형-선생님. 오늘은 이거!”

 

가방을 내려두고 자리에 앉는 백현의 앞으로 스케치북을 자랑스럽게 펼친 준영이 턱을 괴고 백현을 바라봤다. 오늘의 주제는 핵.인.싸 되는 첫인상과 눈 마주 보고 대화하기. 준영의 핵.인.싸 되는 법, 그 탄탄한 커리큘럼의 다섯 번째 주제였다. 처음 시작은 백현이 편하게 말을 할 수 있도록, 책 읽어주기, 노래 부르기 등을 이어가던 준영이 드디어 처음 만난 사람과의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준영은 제가 그린 그림과 글을 열심히 읽어 내려가는 선생님의 얼굴을 보며, 열심히 감탄 중에 있었다.

  

“이거 준영이가 그린 거야? 그림도 잘 그리네-”

“헤헤. 숙제도 다 했어요!”

 

곧바로 펼쳐진 문제집 위를 바라보며 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다시 칭찬을 받으며 입꼬리가 하늘 위로 올라간 준영이 슬그머니 백현의 옆으로 붙어 앉았다. 

 

“백현이 형 선생님은 웃는 게 예쁘니까 이거면 충분해요.”


준영의 핵.인.싸 되는 법은, 백현 꼬시기가 된 지 오래라는 것을 백현은 여전히 몰랐다. 

 



“오늘은 왜 바로 가야 해요..?”

 

주에 한 번, 수업을 오는 날에는 꼭 저와 놀아주고 가던 백현이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겨 일어나는 것을 보며 준영은 울먹거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저를 바라보는 동그란 눈동자에 백현이 미안한 표정을 하며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미안해 준영아. 다음 주에는 꼭 시간 낼게-”

“준영아- 선생님 곤란하시게 뭐 하니. 얼른 인사 드려.”

“죄송해요. 오늘..”

“알아요. 백현씨, 오늘 병원 가시는 날이잖아요- 매번 이녀석 때문에 미안해서 어쩌나..”

“힝..”

“준영아 미안. 이거 잘 보고 연습해 올게. 다음 주에 보자-”

“네. 안녕히 가세요..”

 

현관에 서서 몸을 비틀면서도 손을 흔드는 백현에게 마주 인사를 해준 준영이 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현관문이 닫히자 준영은 한숨을 폭 내쉬며 안으로 들어가는 엄마의 옷자락을 끌어 당겼다.

 



“엄마, 그 아저씨 이름이 뭐라고?”

“뭐? 누구?”

“백현이 형, 소울메이트.”

 

물론, 그 울상은 백현에게 보이는 얼굴일 뿐. 준영은 사실 쿨 한 남자였다. 백현을 떠나 보내야 하는 것은 아쉽지만, 일단 적을 알아야지 않겠나.

 

“준영아.. 그냥 포기해.”

“아 왜에!!”


저렇게 예쁜 백현이 형-선생님을 어떻게 포기해!!!!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 쿵쿵, 소리를 내며 제 방으로 돌아간 준영이었다. 

 


 

하지만, 정말 모르는 것은 사실 준영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

 

제 곁으로 다가서는 백현을 바라보는 찬열의 시선을, 그리고 그 시선을 여전히 마주하지 못하고 붉어지는 볼을 제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는 준영이는 왜 제가 백현을 포기 해야 하는지 당연히 알지 못했다.

 

숨을 고르며 그의 옆으로 다가서는 백현의 앞으로 찬열이 손을 내밀었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모양인지 손을 내미는 찬열이나, 그걸 바라 보고만 있는 백현이나 서로의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꼭 열 일곱의 첫사랑을 바라보는 기분이라는 것을. 

 

“부축. 안 해줘?”


멍하니 그의 손을 바라보고 있던 백현이 고개를 숙이며 제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에선 이제 부축 필요 없으시잖아요.. 하는 변명이 곧바로 떠올랐으나 백현은 그의 손을 잡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따뜻한 온기가 그의 손끝을 타고 저에게로 전달되는 것을 느끼며 백현이 숨을 느리게 들이마셨다.

 

제 손목을 스치는 그의 코트 자락이 초봄의 차가운 기운을 이기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오랜 기다림에 지친 것인지 겨울의 끝자락 같은 온도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냐는 제 물음에 그는 거짓말을 한 모양이다. 

 

“집에서 기다리시지..”

“왜?”

“그야..”

 

거기서 왜냐고 물어보면 제가 어떤 답을 해줘야 하는지 난감해 할 걸 뻔히 알면서 찬열은 짓궂게 묻는다. 답을 재촉하듯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손끝을 꼼지락 거리며 머뭇거리자 그가 제 손을 끌어 당겼다. 제 옆으로 바짝 다가선 거리에 백현이 숨을 멈췄다. 

 

“왜.”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하며 눈을 깜빡거린 백현이 느리게 숨을 뱉어내며 입술을 달싹였다.   

 

“..추운데, 감기라도..”

 

그의 손이 제 볼 위를 스치는 것을 느끼며 백현은 말을 멈췄다. 제 얼굴을 감싸는 커다란 손이 볼과 귓가, 목을 느리게 스치며 움직이는 것을 느낀 백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백현의 숨소리가 그 속도에 맞춰 이어졌다.

 

“걸릴까봐?”

 

백현은 저도 모르게 손 끝에 힘을 꽉 주어 제 옷자락을 잡았다. 부드러운 코트 위로 손이 미끄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걱정마. 허락 받고 아프기로 했잖아.”

“..”

 

제 입술 위로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그의 손끝을 느끼며 백현이 눈을 감았다. 

 




 

준영은 아마 앞으로도 조금 오랫동안, 핵.인.싸 수업 즉 제가 만든 커리큘럼의 최대 수혜자가 찬열-a.k.a 제 라이벌-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제 앞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며 책 읽어주기를 연습한 백현이, 누구의 앞에서 47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어 주었는지, 그 두꺼운 책을 읽어주는 내내 그를 바라보던 시선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소파에 마주 앉아서 그의 잔잔한 목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던 것이 누구였는지, 책을 읽다 깜빡 잠이 드는 백현을 안아 침대로 눕혀 준 것이 누구였는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서 서로의 시선이 마주칠 때 마다 따스한 온기를 나누던 것이 누구였는지는 .. 전혀, 모를 것이다. 








3월, 백현은 새 학기를 앞두고 있었다.

 

오랜만에 찬열과 백현은 준면과 종인, 영호를 만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병원에 다녀오던 길에 영호에게 연락이 오면서 순식간에 자리가 마련되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김종인이요.”

“이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간 세 사람은 이미 도착해있는 준면과 영호를 보며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그들을 꽤 오랜만에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그러게요 형님.”

“너 말고.”


칫- 입술을 삐죽이며 젓가락을 입에 무는 종인을 슬쩍 흘긴 준면이 백현을 향해 턱을 들었다. 

 

“먹어. 아직 저녁 전이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백현은 슬쩍 제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영호에게서 술잔을 받고 테이블 위로 그것을 내려둔 찬열이 젓가락을 쥐자 그제서야 테이블 위로 손을 뻗는 백현을 바라보며 준면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백현이 너도 이제 대학생 되면 술 엄청 마시겠다.”

“어, 맞아. 새내기되면 술 독에 빠져 산다는데-”


저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느끼고 고개를 살래살래 저은 백현이 찬열의 얼굴을 돌아봤다.

“저번에 술 마셔 봤으니까- 오늘은,”

“언제?”


힉.. 종인은 저도 모르게 뱉은 말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백현을 바라보던 시선이 저에게 날카롭게 꽂히는 것을 느끼며 하하- 어색하게 웃은 그가 눈을 굴리며 그, 그러게요. 언제더라- 머뭇거리며 술잔만 채우고 있었다. 

 

“술을 김종인한테 배웠어?”


준면의 물음에 서둘러 찬열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 종인이 답했다.


“영호도 있었습니다. 형님.”

 

저 새.. 영호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떨어진 목소리에 큼, 목을 가다듬었다. 저에게 닿는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젓가락을 움직이던 영호의 손을 잠시 바라보던 준면이 술병을 들어 올렸다.

 

“그럼 뭐, ..마실 줄 알겠네.”

 

자기 주량은 알아둬야지, 그의 말을 시작으로 결국 백현의 손에는 술잔이 들렸다. .. 어느새 목적은 저녁이 아니라 술이 된 지 오래고, 한 잔 두 잔, 술잔을 비워내는 동안 찬열은 옆에서 제 목을 긁적이고 있을 뿐이었다. 준면을 말리기엔 힘들고 백현을 말리기엔 이미 정신이 조금 혼미해진 것 같아서.. 준면의 말대로 자신의 주량을 알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한 찬열은 자신을 뺀 네 사람의 술자리를 느긋하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뭐.. 취하면 제가 데려가면 그만 이고..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잔이 병으로 바뀌고 한 병.. 두 병, 빈 병이 늘어갈 때 마다 찬열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지만 백현은 이미 취기가 잔뜩 오른 후였다. 처음 마셔보는 것은 아니나 분위기가 그때와는 전혀 다른 술자리에서 백현은 술이 취해 발개진 얼굴을 제 손등으로 매만지며 상체를 기울이고 있었다.  

 

“백현아- 대학생 되는데 뭐 필요한 건 없냐?”

“그래, 백현아! 뭐 가꼬 싶은 건 없어?”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은 준면의 말을 발음이 살짝 꼬인 종인이 거들었다. 백현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평소엔 잘 보여주지 않던 -실실-웃는 얼굴은 덤이었다. 고개를 저으면서도 몸을 비틀대는 백현을 바라본 찬열이 그의 앞에 놓인 술잔을 치워내려는 듯 손을 뻗을 때였다. 

 

“우리 백현이는 주사가 애교인가-”

 

백현의 볼을 살살 꼬집은 준면이 제 손에 닿는 시선을 느끼며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씨구, 저게 형님 손을 뚫어버리려고 그러네 아주.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짐짓 모르는 척을 한 준면이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술병을 들어 올렸다. 

 

“백현아- 더 줄까?”

“네에-”


병 입구를 백현의 술잔으로 기울이며 묻는 준면의 말에 백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의 옆에서 비틀거리며 두 손으로 술잔을 들어 올리는 백현을 바라본 찬열이 끝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네에는 무슨, 이제 그만.”

“니가 왜 그래. 백현이가 마신다는데-”


준면의 핀잔에 끙, 소리가 날 듯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던 찬열을 백현이 그제서야 슬쩍 바라봤다. 그 시선에 찬열이 눈을 뜨고 그 얼굴을 마주 보자 백현이 어깨를 움찔 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허- 찬열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동안 저에겐 눈길 한 번 안 주더니, 이젠 제 시선까지 피한다.

 

“내일 속 아파서 어쩌려고.”

“..”


술잔으로 입술을 축이던 백현이 그의 목소리에 슬쩍 시선을 움직였다. 그러더니 제 고개를 꺾어 단숨에 술을 들이키고는 잔을 테이블 위로 탁 내려두더니 다짜고짜 손을 뻗어 찬열의 술잔을 쥐어 가는 것이 아닌가. 찬열은 그의 행동에 놀라 뒤늦게 손을 뻗었다. 얇은 손목을 잡아 당기자 백현이 제 입술로 가져가던 술잔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아..”


백현이 조그만 소리를 뱉어내며 고개를 숙였다. 바지와 바닥으로 쏟아진 액체가 빠르게 백현의 바지 위로 스며드는 것을 보며 찬열이 미간을 찌푸렸다. 바닥을 구르는 술잔을 들어 테이블 위로 올려둔 그는 얼마나 젖었는지 확인을 하려는 듯 백현을 일으켜 세우고 바지 위를 털어냈다. 무릎 아래가 온통 짙은 색으로 젖어 들어 있었다. 제 손에 팔이 붙잡힌 상태로 자꾸만 비틀거리는 백현을 바라본 찬열이 무너져 내리는 마른 몸을 제 다리 위로 앉히고 바닥을 닦아냈다.

 

“그걸 니가 왜 마셔.”

“..”

 

제 술잔을 가져가던 백현의 행동을 떠올리며 아직도 어이가 없는 듯 추궁하던 찬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제 행동을 받아내고 있는 백현을 돌아보았다. 그제서야 찬열은 시야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현이 제 다리 위에 앉아 있으니 거의 안겨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어서 였다. 제 품 안에서 자신의 손끝을 매만지던 백현이 제 시선을 느끼고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속.. 아플 까봐..”

 

작은 목소리에 찬열이 느리게 숨을 뱉어냈다. 누가 저 속 아플 까봐 걱정해 달라했던가, 속 아프니까 그만 마시라고 한 거지..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백현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던 찬열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 손길에 고개를 든 백현이 느리게 눈을 감는 것을 바라보며 그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집에 가자.”

 

여기는 구경꾼이 좀 많네. 저들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시선을 느낀 찬열이 이성을 부여 잡으며 백현을 안고 일어섰다. 제 몸이 갑자기 공중으로 붕 뜨는 느낌에도 아랑곳 않던 백현은 테이블을 위로 다시 손을 뻗었다. 아마 제가 누구의 품에 안겨 있는지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더 마실-”

“먼저 가보겠습니다. 형님.”

“..그래. 고생해라.”

“들어가세요 형님.”

 

준면은 저를 쏘아보는 눈빛에도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옆에서 종인과 영호는 아쉽게 되었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다시 술잔을 채웠다. 아, 우리 백현이 주사도 볼 수 있었는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찬열은 백현의 발에 신발을 신기고 비틀거리는 몸을 바라보다 그의 앞으로 앉았다. 업고 가는 것이 빠르겠다 생각한 탓이다. 그의 팔을 잡아 제 어깨 위로 두른 찬열의 손이 제 팔을 끌어 당기자 백현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넓은 등을 바라봤다. 백현은 그의 다리가 아직 완전히 아물기 전이라는 것도 잊은 채 그에게 업혔다.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웅얼거리며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조차 가늠하지 못했다. 

찬열은 자꾸만 미끄러지는 팔을 잡고 슬쩍 뒤로 시선을 돌려 백현의 얼굴을 바라봤다. 물론 머리칼을 확인한 것이 전부였지만, 그의 몸을 받쳐 걸음을 옮기는 찬열의 등 뒤로 백현이 얼굴을 비비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보다 조금 뜨거운 온도의 숨이 제 등 뒤로 부서지는 것을 느끼며 찬열은 헛웃음을 흘렸다. 어른스러운 백현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면 찬열은 늘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 벅차기도 하다. 평소 저에게 보이는 꾸밈 없는 모습들도 물론 좋지만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것은 자주 있는 기회가 아니었으니 새로웠기 때문이다.

 

“음..차..ㄴ..”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였다는 것은 괘씸했지만 잠에 취해 자꾸만 미끄러지면서도 저를 찾는 작은 목소리에 오늘은 봐주기로 했다.


“술은 이제 못 마시게 해야겠다.”

 

물론 앞으로도 봐준다는 소리는 아니고, 백현은 제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꿈에도 모른 채 찬열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고 있었다.


“찬..열.”

“..왜 백현아.”

“잔.. 녈..”

“졸리면 자.”


저를 업고 걷는 느린 걸음이, 등 뒤로 전해지는 그의 낮은 목소리와 그 온기가 백현은 사무치게 좋았다.


“좋..아. 해요.”

“..”


그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백현은 제 팔로 그의 목을 끌어 안으며 중얼거렸다. 


“ㅊ .. ㄴ ㅕ..ㄹ .. 조..아.푸후.”


푸흐- 뱉어내는 숨이 그의 어깨 위로 흩어졌다. 볼이 그의 어깨 위로 눌려 축 늘어진 백현이 완전히 잠에 빠지고 나서야 찬열은 그의 몸을 한 번 더 추슬러 안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여튼..”


맨 정신에는 하지도 못할 거면서.. 늘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회피하며 저를 몰래 바라보기 바쁜 백현을 잘 알아서 찬열은 작게 웃으며 내일은 꼭 놀려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을 좋아한다는 그의 고백에 대한 답도 들려줘야 겠다고.




다음날 아침 눈을 뜬 백현은 또 다시 제가 찬열의 침대 위에 누워있다는 사실에 제 머리를 쥐어 뜯으며 상체를 일으키다 핑핑 도는 머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침대 위로 풀썩 주저 앉았다.


“일어 났어?”

“으.. 네.”

“이거 마시고 누워.”


그가 트레이를 들고 침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며 백현이 다시 어렵게 몸을 일으켰다. 그게 뭐냐는 제 의문스러운 얼굴에 그가 꿀물. 짧게 답을 하며 제게 컵을 건냈다. 따뜻한 컵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꿀꺽 꿀꺽 삼킨 백현은 빈 잔을 트레이 위로 올려두며 물었다.


“저.. 어제. 어떻게..”

“내가 업고.”


힉- 백현이 숨을 들이 마시며 동작을 멈춘 그가 눈을 굴려 그의 얼굴과 다리를 바라봤다. 


“다, 다리.”

“괜찮아 그정도는.”


절대 괜찮지 않다. 절대. 물론 옷 위로 그의 다리가 어떤지는 전혀 알아 볼 수 없지만. 백현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를 살피기 바빴다. 그 시선을 느낀 찬열이 조금 웃으며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 동안 백현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그리고 어제 못해준 말이 있는데.”

“네?”


제 말에 다시 저와 시선을 마주하는 백현을 보며 찬열이 싱긋 웃었다. 백현은 그의 얼굴을 보며 조금 넋이 나간 표정을 해 보였다.


“나도 좋아해. 많이.”




찬열은 이제 솔직해지기로 했다.


니가 없는 봄은 봄이 아니었는지, 

너와 함께 맞이한 이 봄은 저에게 온통 새로움 뿐이라고,

니가 없이 나는 계절도 중요하지 않았고

내일도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불완전하던 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온전한 니가 

지금 저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너의 손을 잡고 있는 지금이 내 현재라는 걸,

너의 미래가 내 미래라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고..

아니, 긴 삶을 살아오며 처음으로 확신한다고, 

니가 나의 계절이고, 니가 나의 비라는 것을. 


그리고 


이 마음이 너와 같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반짝이는 것이 내 앞의 세상인지, 너인지. 

찬열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이렇게 

너의 눈을 마주하고 

너를 품에 안으며 

솔직해지기로 했다.


백현아. 


내 사람아 .

나의 곁에 있어줘.



 




 

“이번주는 이거야?”

“..어려워요.”

 

서재-백현이 쓰던 방이 서재가 되었다.- 책상 앞에 앉아 이마를 꾹꾹 누르던 백현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찬열이 주스가 담긴 유리컵을 그 앞으로 내려두며 그가 바라보고 있던 페이지를 살폈다. 

 

호감 가는 첫 인상 이라.. 준영의 트레이닝이 빛을 발하던 것은 백현이 제 앞에서 책을 펼치고 조용한 목소리로 읽어주기 시작했을 때나 노래를 불러주던 때라고 생각했던 찬열에게 이런 주제,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인간관계, 즉 친구 사귀기에 돌입하게 되면서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진심이었다. 웃으면서 말을 거는 것이나 타인과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눌 것? 게다가 저 예쁜 미소라고 써있는 글씨 옆에 별표는 뭔데? 물론 제 진심 -불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내비치지 않으려 노력은 하고 있으나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찬열이었다. 

 

“마트 갈 건데, 같이 갈래?”

“네.”

 

이렇게 대놓고 방해 공작을 펼치는 걸 보면, 앞으로 준영의 수업에는 단단히 차질이 생기지 싶다. 

 

 


차를 타고 대형 마트로 향한 두 사람은 카트를 끌고 식품 코너를 돌았다. 요즘엔 요리하는 것이 취미를 넘어서 본업처럼 되어버린 찬열은 식재료를 까다롭게 고르고 백현이 좋아하는 것들을 알아내느라 바빴다. 제 스스로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신경 쓰지 않던 지난 날은 잊은 지 오래인 듯 했다.

 

카트를 끌고 느린 걸음을 움직이는 찬열을 따라 백현은 그의 걸음이 닿는 곳, 그의 시선이 닿는 마트 안의 물건들과 자신들을 지나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대부분 가족이나 연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보니 다른 사람의 눈에도 그와 제 모습이 그렇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처음 그와 함께 마트를 왔던 때의 기억도 떠올랐다. 아직도 저에게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긴 했지만 백현은 그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실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할 만큼 백현은 찬열과 함께라면 제가 어디에 있건 무얼 하건 상관없었다.


제 옆에서 저와 발을 맞춰 걷고 있는 찬열의 커다란 손이 카트 손잡이를 밀고 가는 것을 바라보던 백현은 별안간 들린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찬열씨?”

“..아. ..안녕하세요.”

 

찬열의 이름에 제가 먼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녀는 제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듯 저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 행동을 따라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인 백현은 느리게 시선을 들며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서 다 뵙네요.”

“..그러게요. 장, 보러 나오셨나 봐요.”

“네. 아가씨랑 같이,아. 저기 오네요.”


제 등 뒤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고개를 돌린 찬열이 희정과 눈을 마주했다. 

 

“언니. 걸음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아가씨가 느린 거죠- 거북이야. 완전.”

 

민서의 말에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 희정이 카트 안으로 라면 봉투를 밀어 넣으며 찬열을 돌아봤다. 

 

“오랜만이네요.”

“어. 그러네.”

“장 보러 온 거에요?”


희정의 시선이 제 얼굴에서 제 손이 닿아있는 카트로, 그리고 자신의 옆에 서있는 백현에게로 옮겨가는 것을 바라보며 찬열이 뒤늦게 답을 했다. 

 

“어..”

“가요. 언니. 필요한 건 다 산 거 같은데..”


희정이 대충 카트 안을 둘러보며 말하자 민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요. 그럼.


“아. 찬열씨, 시간 되시면 다음에 저희 집에 또 놀러 오세요. 하준씨가 많이 좋아 하더라구요.”

“아, 네. 그럴게요.”

“그럼. 다음에.. 봬요.”

“..그래.”

 

멀어지는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던 찬열은 옅은 한숨을 뱉어내며 다시 카트를 끌었다.

 

“가자. 백현아.”

 

살 건 다 산 것 같고, 집에 돌아가 저녁이나 해야겠다 생각한 찬열이 고개를 돌려 백현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멀어지는 두 사람의 등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백현이 뒤늦게 그 시선을 느낀 듯 자신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 시선에 찬열이 미간을 찌푸리며 백현에게 다가섰다.

 

“어디, 안 좋아?”

 

그의 어깨를 잡은 찬열의 힘에 백현이 몸이 비틀거리며 그의 품 안으로 쏟아졌다. 조금 거칠어지는 호흡에 조금 놀란 찬열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다 한 순간에 굳어졌다. 

 

“너.. 혹시, 하준이.. 알아?”

 

혹시라고 물었으나 찬열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목소리를 냈다. 백현은 하준을 알고 있는 것이다. 열 아홉, 빗 속에서 제가 하준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던가, 아니 그 뒤로도 저는 비가 오는 날이면 수없이 그의 생각을, 그의 이름을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제가 그를 떠올릴 때 마다 그 책임을 누구에게 떠 넘겼던가.. 생각해보니 지난 번 백현이 아팠던 날도, 하준이 자신을 찾아왔던 날과 겹쳤다. 설마 그때도..

 

“백현아.”

 

이마를 제 품 안에 기댄 채 떨리는 손으로 제 옷깃을 틀어 쥐는 백현을 내려다본 찬열이 그의 등을 쓸어내며 제 품 안으로 당겨 안았다. 

 

“괜찮아?”


 찬열의 목소리가 제 귓가에 내려 앉는 것을 백현은 어렴풋이 느꼈다. 갑자기 주변의 모든 소음들이 점멸하는 것 같았다. 점점 커지는 제 숨소리를 가다듬으며 백현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저씨.. 우리..집에 가요.”



 

집으로 돌아온 찬열은 곧바로 백현을 침대에 눕히고 그의 옆에 앉았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조금 진정이 된 모양인지 혈색은 되찾았지만 여전히 잔뜩 굳어진 얼굴 위를 매만지며 혹시 열이 오르진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백현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응하듯 백현이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자 찬열은 느리게 그의 볼 위를 매만지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백현아..”


저와 눈을 맞추는 제 시선을, 제 목소리를 피하려는 듯 자꾸만 시선을 떨어트리는 백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은 찬열이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그의 이마 위를,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백현은 그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니 잘못 아니야. 백현아. ..내가, 그런 거야.”

“아저씨가,”

“내가 나를, 그리고 너를.. 우리를 괴롭힌 거야.”

 

고개를 가로 저으며 눈을 뜬 백현의 목소리에 찬열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백현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며 찬열이 한숨을 삼켰다. 

 

“하준이는.. 현재를 살아가더라.”

 

그 이름에 반응하듯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찬열은 제 손끝을 떨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가 잊고 있었어. 그 녀석은 늘 나보다 강했거든.”

 

느리게 숨을 들이마시며 조용한 목소리를 뱉어내는 찬열의 입술 위로 백현의 시선이 닿았다. 

 

“..그럼. 하준.. 아저씨는. 괜찮으신 거에요?”

“나한테 그러더라. 현재를 살라고, 과거에 있지 말고.. 그래서. .. 너한테 돌아온 거야.”

 

제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조금 오래전이었으나 찬열은 울지 않는 백현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다. 


“내가 과거에 두고 온 게, 나 뿐만이 아니더라고.”


백현이 눈을 깜빡이며 저를 바라보는 동안 찬열은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아저씨.”


저를 바라보는 동그란 눈동자를 마주하며, 그 안에 비쳐보이는 제 모습을 바라보며 찬열은 답했다.


“응.”


“찬열..”

 

“응.”


찬열은 어렴풋이 백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지만 재촉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자신을 마주하며 순수하리 만치 솔직한 감정들을 비출때 마다 찬열은 늘 조금 천천히, 백현의 속도에 맞춰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입술을 달싹이는 백현의 얼굴을 마주하며 찬열은 옅은 미소를 띄었다.


“우리.. 오늘을 살아요.”


백현이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찬열은 다짐처럼 이어지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들어 주었다.


“내일을 살아요.”

“그래.”


느리게 주고 받던 목소리가 사라진 적막 속에서 백현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제 두 팔로 찬열의 목을 그러 안았다. 자신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던 커다란 손이 제 등 뒤를 감싸는 것을 느끼며 백현은 눈을 감았다. 


백현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가 백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매순간 깨달으면서도 찬열은 늘 백현과 함께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는 알지 못해 불안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나 그 당연함조차 태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찬열은 조바심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백현의 속도에 맞춰, 그가 원하는 대로 그가 하는 대로 모든 것을 맞춰주고 싶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뒤로는 차라리 모든 것이 편했다. 현재를 살기로 한 뒤로, 백현과 함께할 미래를 꿈꾸게 된 뒤로는 오히려. 망설이지 않고 손을 뻗을 수 있었고 망설이지 않고 답할 수 있었다. 


그래.

그래. 그러자. 백현아. 

오늘을 살자. 

내일을 살자. 

같이.


제 품 안에 안겨오는 온기를 두 팔로 그러 안으며 찬열은 눈을 감았다. 








찬열은 제 옆에 서있는 백현의 옆모습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괜찮겠어?”

“네.”


단호한 한 마디를 뱉어낸 백현이 제 손을 꾹 힘 주어 잡는 것을 바라보던 그가 낮은 한숨을 삼켰다. 


“꼭 이럴 필요 없어.”

“제가 그러고 싶어요.”

 

걱정 가득한 찬열의 목소리에 백현이 웃으며 그를 돌아봤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백현은 조금 알 것 같았지만 제 스스로 오겠다고, 가고 싶다고 했던 곳이었다. 물론 조금 떨리긴 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제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제는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 힘들면 말해.”

“네.”



그를 안심 시키려는 듯 웃어 보인 백현이 손을 뻗어 초인종을 눌렀다. 초록색 대문 안 쪽에서 네- 나가요! 하는 경쾌한 목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잠시 심호흡을 한 백현이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안에서 나온 여자와 눈을 마주했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들어오세요!”

대문을 너머 마당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의 앞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던 하준이 백현을 올려다봤다. 민서가 문을 닫고 하준의 뒤로 다가서는 동안 찬열은 하준과 백현을 번갈아 바라봤다. 

 

“왔냐..”

“어. 왜.. 나와있어.”

“..그냥, 뭐 날도 따뜻하고 해서.”

 

하준의 시선이 저에게 닿자 백현은 그가 준면의 사무실로 처음 찾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찬열은 그의 시선에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인사 해. 이쪽은 김 하준. 이쪽은, 내 소울메이트.”

“안녕하세요. 변백현입니다.”

“김 하준입니다. 저번에 봤었죠. 사무실에서..”

“안녕하세요. 백현씨. 이 민서에요- 반가워요.” 

 

백현이 먼저 가보고 싶다고 말을 꺼낸 곳은 하준의 집이었다. 짧은 인사가 오고간 후에 멀뚱히 서있는 세 사람을 잠시 바라보며 웃은 민서가 그들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점심은 드셨어요? 여기 올라오느라 힘들진 않았어요?”

“아. 네.. 괜찮았어요. 저.. 이거.”

“이게 뭐에요?”

 

민서는 제 앞으로 내밀어진 쇼핑백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냥 ..차에요. 커피는 안 드신다고 들어서..”

“어머. 아니 뭘 이런 걸 .. 정말. 백현씨- 친구 집 오면서 뭘 이런 걸!”

“아..그냥. 작은 거라..”

“찬열씨, 말리셨어야죠. 하여튼.. 고마워요. 잘 받을게요. 내가 정말 못살아. 잠시만 앉아 계세요-”


주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민서를 바라본 백현은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다시 제 앞을 바라봤다. 하준과 눈을 마주한 백현이 그의 굳은 얼굴을 살피며 느리게 숨을 뱉어내는 것을 느낀 찬열이 백현의 옆모습을 바라봤다가 다시 하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

“..”


그의 목소리에 하준이 시선을 돌려 찬열을 바라보며 코를 찡그렸다.


“보면 뭐, 안되냐?”

“닳아.”

“지랄.”

“하준씨!”

“..큼.”


 입을 열자마자 벼락같이 쏟아지는 목소리에 하준이 헛기침을 뱉어내며 고개를 돌리자 백현이 옅은 웃음을 뱉어냈다. 그 소리에 하준이 억울한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자 제 아랫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인 백현이 목을 가다듬었다. 


“근데.. 백현씨 몇 살이냐.”

“..”

“..어.. 올 해, 스무 살 되었어요.”


그의 물음에 답을 하지 못하는 찬열을 바라보던 백현이 느리게 입술을 열자, 하준이 경악에 찬 얼굴을 했다. 


“도둑놈!! 여보! 민서야!”

“하준씨. 소리 안 질러도 다 들리거든요-?”

“이 새, 아니 이거. 민서야. 이거 완전 도둑놈이야!!”

 

찬열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격분하는 하준의 얼굴을 웃으며 내려다본 민서가 테이블 위로 쟁반을 내려두며 말했다. 

 

“드세요. 하준씨, 손가락은 좀 내리구요.”

 

테이블 위로 사과와 귤이 예쁘게 담긴 접시, 주스가 가득 담긴 유리 잔이 내려 앉았다. 그 접시와 유리 잔이 바닥을 보일 때 까지 네 사람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해가 떨어질 즘 찬열과 백현은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했다.  

 

“저.. 하준 아저씨랑 할 얘기가 좀 있는데.”

“해.”


그의 목소리에 백현이 말없이 기다리자 찬열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둘이?”

“나가서 기다려. 안 잡아 먹어.”

“..”

“잘됐다. 그럼 찬열씨는 저랑 얘기해요- 나가요 우리.”

 

앞장서서 현관으로 향하는 민서를 따라 일어선 찬열이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 밖으로 나섰다. 백현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테이블 위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제 두 손을 모아 쥐던 백현은 제가 먼저 그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찬열을 쫓아내 놓고 뜸을 들이는 제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저..”

“백현씨.”

 

어렵게 입술을 달싹인 백현의 목소리에 곧바로 하준의 목소리가 덮였다. 백현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말 잘라서 미안한데. 나도 백현씨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아. 네. 말씀..하세요.”

 

백현은 그의 목소리에 마른 침을 삼키며 느리게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저를 바라보던 하준의 표정이 잔뜩 굳어져 있는 것에 긴장감이 손바닥 위로 베어 나왔다. 

 

“박찬열이 잘 해줘요?”

“..네?”

“설마, 저거 아직도-”

“잘. 해줘요.”

 

그의 말에 당황해 머뭇거리는 저를 바라보며 금세 하준이 미간을 팍 찌푸리고 얘기하자 백현이 서둘러 입술을 떼어냈다. 다급한 목소리에 사실을 말하는 것인데도 왠지 모르게 변명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그럼. 됐네.”

“..”

“백현씨가 무슨 말 할지 대충 알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내가 먼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하고.”

“.. 네. 하세요.”

 

하준은, 자신이 모르는 열 아홉의 찬열의 곁에 있던 사람이고, 그의 친구였으며. 그 때 .. 사고라고는 하나 자신 때문에 두 다리를 잃어야 했던 사람이었다. 처음 그를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던 자신의 말에 찬열이 걱정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었을 것이다. 그를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것은 찬열 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스스로도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를 직접 만나서, 그에게 직접 사과를 하고 싶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 부터. 

 

그런 그가 저에게 할 부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백현은 상관없었다.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고 싶었으니까.. 백현은 그가 찬열을 용서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며, 혹시 그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박찬열.”

“..”

 

그의 이름에 백현은 아주 조금 두려웠고 아주 조금 안심했다. 하준이 그의 이름을 부를 때면 마치 그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아 보였다. 열 아홉의 그 때로. 백현은 그가 어떤 부탁을 할지 두렵기도 했고, 그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해 준다는 것에 안심했다. 

 

“..?”

“..네?”


그러나 그는 한참 동안 저를 바라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백현은 제가 딴 생각을 하다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인가 놀라 다시 되물었다. 그런 제 표정을 바라보던 하준이 저를 따라 잠깐 눈을 크게 뜨더니 입술을 끌어 올리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했다. 

 

“박찬열. 부탁한다구요.”

“..”

“뭐, 싫어도 할 수 없긴 할텐데.. 둘이 소울메이트라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저한테 부탁 하실 게 ..”

“덜떨어진 내 친구. 그거 말고 뭐가 있겠어요. 내가 진-짜 어려운 부탁 하는 거 아는데, ..이런 부탁. 백현씨 밖에 들어줄 사람이 없네.”


저를 바라보는 맑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하준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준은 처음 찬열에게 전화를 받고 놀랐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소울메이트를 찾았다는 것도 몰랐는데 그 소울메이트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니 .. 무엇보다 그 사람이 자신과 찬열의 과거와 지금까지의 일들을 전부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나니 어떤 이유로 저를 보고 싶어 하는 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준도 망설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백현을 처음 마주하고 하준은 그를 사무실에서 마주했던 때를 떠올렸으며, 찬열과 맞잡은 손을 바라보며 놀랐다. 물론 자신들에 비해 지나치게 어려 보인다는 것도 그렇고.. 

대화를 나누는 내내 백현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대충 알 것 같았고 그를 바라 보는 찬열의 얼굴과 눈빛을 보며 찬열에게 그가 어떤 의미를 가진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그가 다친 몸을 이끌고 저를 찾아왔던 때, 그리고 다시 와도 괜찮겠냐며 돌아가던 때를 떠올리며 하준은 그가 돌아갔던 곳에 백현이 있지 않았을까 어림 짐작하며 슬며시 웃었다.

 

이제 제 덜떨어진 친구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싶어서.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말이 없었다. 백현은 생각이 많아 보였고 찬열은 그런 백현을 살피며 그가 먼저 말을 꺼낼 때 까지 기다려 주었다. 집에 도착해 거실로 들어서며 찬열은 저를 붙잡는 손에 몸을 돌렸다. 

 

“찬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때면 찬열은 왠지 가슴이 벅찼다. 때론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를 바라보는 짙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찬열은 제 손을 잡고 있는 작은 손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안 물어볼게.”

“..”

“하준이랑 무슨 얘기 했는지 말 안해줘도 괜찮아. 그러니까.”

“아니. ..아니에요.”

“응?”

“그걸 말하려던 게 아닌데..”

 

제가 얘기하기 힘들어 뜸을 들인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찬열이 심각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자 백현은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럼?”

“그거..주세요.”

“그거 ..?”

 

저를 보며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찬열의 손을 잡고 백현이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 불을 켜고 협탁 앞에 멈춰선 백현이 그를 올려다보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

 

찬열은 제 앞으로 내밀어진 하얀 손바닥 위를 바라보며 잠시 눈을 깜빡이다 한숨을 뱉어내며 협탁 서랍을 열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좀.. 됐어요.”

“..”

 

찬열은 느린 동작으로 서랍 안에 잠들어 있던 상자를 꺼내 들었다. 백현은 조바심을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마른 입술을 혀 끝으로 축였다. 찬열이 제 손안에 들린 끝이 찌그러진 상자를 쓰다듬다 백현의 손바닥 위로 올려두었다. 

 

“고민만 하고 계실 것 같아서.”

 

그의 목소리에 찬열이 숨을 뱉어내며 백현의 얼굴을 바라봤다. 백현의 말대로, 저는 고민만 하고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랬을 것이다. 끝이 뭉툭하게 푹 찌그러진 상자 위를 백현이 손 끝으로 매만졌다. 그의 몸이 땅 위를 구르며 함께 만들어진 자국들을 어루만지는 느린 손끝을 바라보며 찬열은 숨을 멈췄다. 마치 그의 손끝이 제 다친 팔과 다리를 어루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였다. 

느린 동작으로 상자를 연 백현은 빛이 스며드는 은색 메탈과 시계 바늘 위로 시선을 두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잠시 눈으로 바라보던 백현이 고개를 들어 찬열을 마주했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까만 눈동자를 마주하며 백현이 웃어 보였다.

 

“주실 때 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부탁을 받아서요.”

“무슨 부탁?”


하준과 둘이 대화를 나눈다고 하더니, 무슨 부탁을 받은 모양이다. 제 물음에도 답이 없이 웃기만 하던 백현은 상자 안에서 시계를 꺼내 들었다. 투명한 글라스 위를 손끝으로 느리게 매만지며 백현이 입술을 달싹였다.


“제 미래요.”


미래를 부탁 받았다는 말을 하는 백현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도 확신에 차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백현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찬열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앞엔 찬열이 서 있었다.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거리에 서서 백현은 그의 볼 위로 입술을 대었다. 짧은 입맞춤을 남기는 제 행동에도 그저 멍하니 서있는 그에게서 다시 한걸음 물러나며 백현이 말했다. 

 

“감사해요.”


저에게서 멀어진 백현의 정수리 위를 바라보던 찬열이 자신의 손목 위로 시계를 차는 백현을 바라보며 손을 뻗어 그의 손목 위로 시계를 채워 주었다. 차가운 메탈 소재의 시계는 어느새 백현의 온도를 머금고 있었다. 

조금씩 움직이는 시계 바늘을 바라보던 찬열이 그 가느다란 손목 위를 매만졌다. 부드러운 피부 위를 매만지는 커다란 손을 바라보며 백현이 그의 얼굴을 바라봤으나 찬열의 시선은 여전히 제 손목 위로 떨어져 있었다. 그의 짙은 눈썹과 긴 속눈썹, 오똑한 콧날을 바라보며 백현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백현아.”

“네.”

“고마워.”

“..”

 

마주친 눈동자 안으로 제 모습이 비치는 것을 바라보며 숨을 느리게 뱉은 백현이 손을 뻗었다. 찬열의 얼굴 위를 어루만지며 백현이 제 아랫 입술을 잇새로 물었다. 

 

“아저씨.”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가득 담긴 제 모습을 확인하는 백현의 눈꼬리 끝이 반짝거렸다. 

 

“키스.. 해도 돼요?”

“.. 얼마든지.”


백현이 다시 한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찬열의 온기가 코 끝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한번도 확신해 본 적은 없었다.

이 세상도, 제 미래도.

살고 싶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으니까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했던 삶.

그러나 이제 백현은

확신한다.

그의 곁에 있는 것이

그가 

그의 모든 것이

좋다.

그 하나의 확신은 미래를 만든다.

그와 함께하는 미래.

그리고 이제 백현은

그 하나로 충분하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던 삶

어떤 것도 믿지 못했던 삶

그러나 이제 백현은

그를 원하고, 그를 믿으며

자신을 온전히 그에게 내어 주기로 했다.


나의 사람아

나의 곁에 있어줘.





 






-

이번 편에 완결을 쓰려고 했는데,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한편 더 추가했습니다..! 

꿈속에서 그댈 만날수 있다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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