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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백| 호우주의보 - 외전 [백현시점]

(呼偶)주의보 | 레인버스+느와르

*이번 편은 백현시점으로 백현의 과거, 전 편에 있었던 일들이 교차하며 나옵니다. 조금 헷갈리실 수 있을 것 같아 미리 알려드려요.

*warning _ roman n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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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이 버림 받은 것은 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반나절을 꼬박 앉아있던 아이는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서로 인도되었다. 아이는 낯선 환경에 두려움을 표하거나 엄마를 찾으며 울지 않았다. 말 한마디 없이 저를 데려가는 경찰 아저씨들을 따라 조용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누군가 그를 보며 녀석 겁에 질린 모양이네.. 중얼거렸으나 사실 백현은 겁이 나진 않았다. 적어도 경찰서 안은 어둡고 습한 곰팡이 냄새가 가득한 찬장이나 옷장보다는 크고 밝았으니까.. 누군가 저에게 부모님에 대해, 사는 곳에 대해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느리게 가로 저으며 제 두 손을 그러쥐고 있을 뿐 이었다. 그 뒤로는 시간이 물 흐르듯 흘러 갔다. 어느새 저는 보육원 방 안에 웅크린채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저는 엄마의 얼굴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는 제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었다. 

 

- 아무 말도 하면 안돼. 아무것도. 말하면 안돼. 소리도 내지 말고 있어. 얌전히, 기다리면 엄마가..엄마가 데리러 올게.


옷장이나 찬장, 어둠 속으로 작은 몸이 숨겨지며 듣던 익숙한 말들이었다. 아마, 태어나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들이었을 테다. 

 

- 평소처럼, 아가. 

아무 말도 하지마. 

말. 하지마.


그것은 주문 같은 말이었다. 주문 같은 단어였다. 아이는 자라면서 큰 소리 한 번 낸 적이 없었다. 넘어지고 다치고 무릎이 깨져 피가 철철 흐르고, 눈물이 하얀 얼굴 위로 덕지덕지 들러 붙을 때에도, 아이는 소리 내어 우는 일 조차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야, 살 수 있었으니까.  

 

가느다란 손가락이 입술 위를 세로로 가로지르듯 올라가 쉿- 조용하게 뱉어내는 숨소리 같은 소음, 그것이 그녀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이었다. 

 


-

아이가 기억하는 것은 자신의 이름과 나이가 전부였다. 어지간히 멍청하면 자신을 낳아준 부모도 기억 못할까. 그것이 저를 맡았던 보육원 원장이 저를 보며 하는 버릇 같은 말이었다. 어지간히 멍청하면, 포대기에 쌓여진 갓난쟁이도 아닌 무려 일곱이라는 나이를 먹도록 엄마와 함께 지냈으면서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다니.. 그녀는 자애롭고 지혜로운 이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원장은 손 버릇이 나쁜 사람이었다. 제 기분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은 당연했고 사소한 일에도 소리를 지르고, 폭력을 행사했다. 원장이라는 자신의 위치와 힘없는 아이들, 아마 그녀는 자신의 말이나 행동들을 전부 그래도 되는 일로,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 한지 오랜인 것 같았다. 그렇게 대해도 되는 아이들. 그렇게 해도 되는 사람. 그녀의 머릿속에 아이들과 제 위치는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누가 밥을 엎으래 누가!!!”


작은 몸을 내리치는 커다란 손에 아이들은 힘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똑바로 서!!”


몇 번이나 무너지는 마른 다리를 끌어다 제 앞으로 세운 여자의 손에 무차별적으로 폭행 당하는 아이들의 시선은 전부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똑바로 안 서!?!” 

 

밤새도록 울었다. 울다 지쳐 잠이 든 곳은 아무도 없는 한적한 건물의 뒤편, 얼어 죽지 않은 것은 여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현은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배가 고팠고 다리가 아팠으며 누군가에겐 여름날의 시원한 빗줄기였을 비가 제 몸을 때리는 것은 차갑고 슬펐다. 풀벌레가 발 밑을 기어 다니는 것을 바라보던 아이는 애써 시선을 옮겨 팔 위로 얼굴을 묻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차가운 벽의 한기가 얇은 옷을 스밀 때 마다 몸을 달달 떨면서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소리를 내어 우는 일도 제 고통을 호소하는 일도. 백현은 엄마의 얼굴 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물론 그때의 백현은 소울메이트가 무엇인지, 비가 오면 왜 세상의 소리들이 멈춘 것 처럼, 귀를 틀어 막은 것처럼 들리지 않는지 알지 못했다. 비가 오면 세상의 소리들이 멈추고 누군가 저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백현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느꼈다. 그것이 깨질 듯한 소음과 날카로운 목소리가 점멸하듯 멀어지는 순간에 대한 편안함인지 그의 목소리에서 느끼는 편안함인지 아이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제 울음 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저에게 소리를 질렀을 때 백현은 다시 깨달았다. 아.. 나는 말을 하면 안되는 구나. 울어도 안되는 구나. 아이의 세상은 그렇게 다시 적막 속에 갇혀 버렸다. 백현은 그때 생각했다. 제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라고,




아이는 조용히 지내는 법을 터득했다. 말을 하지 않고 울지 않으니 손찌검을 당하는 횟수가 줄어들었으며 저를 바라보던 시선들이 사라졌다. 아이는 그것이 제가 살아갈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는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제가 살아남을 방법은 이 것 뿐이라고.


나이가 들어 보육원에서 독립을 해야 할 때가 되었을 때 백현은 처음으로 안도했다.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당장 잘 곳이나 먹을 것, 입을 것 하나도 전부 돈과 직결되는 세상에서 아르바이트로 하루하루를 벌어 살아가는 것은 걱정이었으나 단 하루도 저 자신을 사람으로 대접해주지 않던 사람과 함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기뻤던 것이다. 


혼자 살아가는 일은 버거웠다. 학교를 가면 벙어리라 저를 놀리는 아이들이 있었고, 이유 없이 저를 괴롭히는 아이들도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하루 종일 무거운 짐을 나르고 청소를 하고 땀을 흘리고 뛰어 다녀도 겨우 제가 누울 방 한칸을 마련하고 굶지 않을 정도의 생활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어느 순간 제가 태어나 한번도 보지 못했던, 아니. 어둠 속에서 소리만 들어보았던 아버지라는 사람의 빚까지 떠 안고 나서는 그를 향한 원망과 증오보다도 높은 숫자의 빚에 대한 생각을 하며 또 하루하루를 살았다. 살아있으니까 살았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 살아가고 있었다. 세상은 언제 끝이 날까.. 이 지긋지긋한 회빛 세상의 끝은 어디일까. 저는 이 곳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백현은 저를 밀치고 욕을 하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익숙했다. 아이들의 괴롭힘은 피하고 도망을 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살아 남기 위해서 공부를 하면서도 단 한번도 그것이 재밌다거나 흥미롭진 않았다. 그것은 살아 남기 위함이었고 제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였으며 또 다시 버림받고 혼자 남겨져 울지 않기 위해서 였다. 그것이 세상이든 누구에게든,.. 


비가 오면 익숙하게 이어폰을 꽂았다. 그것은 누군가 제가 비가 오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 소울메이트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게 하기 위한 도구이자 세상의 소리를 차단하는 것이 비 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비가 올때는 사람들의 입술을 보며 말을 들었다. 대부분 저를 보며 지시하는 것들은 일에 관련된 것 뿐이었으니 어렵지 않게 알아 들을 수 있었다. 

하나뿐인 MP3 플레이어는 중고로, 처음 살 때부터 들어있던 아마도 전 주인이 들었을 음악들이 전부였다. 자신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던 제목이나 가수도 알지 못하는 노래들. 클래식 같은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비가 오는 날에만 사용할 생각이었으니까. 딱히 좋아하는 노래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

진 사장의 사무실 소파에 앉아있던 백현은 또 다시 제가 짊어져야 할 무게 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알바비를 전부 빼앗기고도 원금은커녕 이자나 겨우 갚으며 살아가는 삶. 백현은 더 이상 그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제 앞으로 내밀어지는 신체 포기 각서와도 같은 엉터리 문서를 바라보며 언젠가 제 삶을 포기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지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를 마주한 순간에, 저를 바라보는 시선과 제 앞으로 다가서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백현은 7살, 건물 뒤편에서 울며 잠이 들었던 그 날 이후 처음으로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꼈다. 감정이라는 것이 사치였던 아이에겐 아주 오래 전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감정들의 출연은 뜻 밖의 상황일 수 밖에 없었다.


“알아서 해.”


저를 지나쳐가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백현은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얇은 옷을 뚫고 스며드는 차가운 기운, 습한 공기. 흙 냄새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백현은 단번에 알아챘다.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그러나 

백현은, 

그는 계속 몰랐으면 하고 바랬다.


제가 그를 알아봤다는 사실을..


그를 만난 날, 백현은 소울메이트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다시 생각했다. 찾고 싶지 않다고 발버둥을 치던 사람과, 그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 결국에는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운명이라는 것인가 생각했다. 운명이란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김준면 사장에게 제 채무를 잡히고 찬열의 앞에서 초라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죽을 만큼 부끄러웠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백현은 이번에도 제 처지가 흐르는 물 위를 떠다니는 부러진 나뭇가지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서 멈춰 설지 알지 못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았으니까.. 


그렇게 흘러간 백현이 도달한 곳은 그의 집이었다. 그의 집에 제 방이 생기고 그 방 안에 가구들이 들어왔다. 전부 제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가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백현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전부 제 것이 아니다. 그의 집, 제 방. 침대와 책상, 무엇 하나도. 아이는 몸을 웅크리고 어둠 속에 숨어 들었다. 차가운 벽의 온도를 느끼며 다시 제 자신에게 되뇌였다. 여기는 아니야.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가 누군지 깨닫게 되면.

저를 버릴 것이라는 것을.

 

「 최대한 빨리 나갈게요. 」 

「 귀찮게 하는 일 없게 할게요. 」 


아이의 말은 찬열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에만 몰두하기로 마음 먹었다. 회색빛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그를 만나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는 언제나 저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너 찾을 생각 없어. 난. 

그러니까 너도 나 ..찾지 마.

니가.. 누구건, 어디에 있건. 관심없으니까.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우린.

그쪽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없어. 난..


비가 올 때면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단 한번도 그의 말에 답을 한 적은 없었으나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을.


“찾을 생각 없습니다.”

 

“..전에 물으셨잖습니까.” 


저에게 하는 말인지 다짐처럼 하는 말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확실한 것은 그가 저를 찾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닥쳐.

그만!! 그만 울란 말이야, 


그..만. 


꿈을 꾸면서도 고통 받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가섰던 백현은 제 목을 틀어 쥔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이미 오래전에 들었던 목소리와 같은 그의 목소리는 단순히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 사고마저 전부 멈추게 만들어 버린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지는 것을 바라보며 백현은 그를 아프게 하는 것이 여전히 저일까 두려웠다. 

숨을 몰아쉬며 뜨거운 눈시울 위를 팔로 내리 눌렀다. 눈두덩이 위로 느껴지는 열기가 느껴지지 않은 것은 이미 숨조차 뜨거워졌기 때문이리라. 가느다란 목선과 어깨, 팔과 손 끝이 떨리는 것이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니까 백현이 찬열을 두려워했던 이유는 저보다 한참이나 큰 그의 체격이나 외모, 직업때문이 아니었다. 조용하고 딱딱한 성격, 낮은 목소리, 날카로운 시선 때문이 아니었다. 

 

백현은 그가 저를 알아볼까 두려웠고 그가 저를 증오하는 얼굴로 마주하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이런 날이 올까 두려웠던 거다. 제 목을 조르고 저에게 울분을 토해내는 그를 바로 앞에서 마주하는 날이 오게 될까 두려웠던 거다. 백현은 다시 한 번 제가 말을 하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울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저를 알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가 저를 피하고, 보고 싶지 않아 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서 빚을 갚고 그의 집에서 나가기 만을 바라며 백현은 다시 또 열심히 일을 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그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백현은 제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느끼며 깨달았다. 제 두려움이 단지, 그에게 제 정체를 들통나는 것이 아님을..


“니가 가는 게 좋겠다.”


고개를 숙이는 저를 바라보며 준면은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내가 그랬지. 니 머리가 나한테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근데, 그거 말고도 또 있어. 내가 널 도운 이유.”


그의 말에 백현이 그를 마주했을 때 어렴풋이 느꼈다. 아, 이 사람은 알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어쩌면 처음부터 .. 

 

“나는 널 돕는 게 아니라, 박찬열, 그 자식을 돕는 거야.”


그러나 그는 알지 못한다. 자신은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그의 말대로 제가 찬열을 도울 수는 없겠지만 백현은 그의 곁으로 갔다. 크게 다치지 않은 모습에 안도하고 그와 함께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저도 모르게 그가 했던 말을 꺼내 들었다.


「 비가 금방 그칠 것 같지 않네요. 」


종이 위로 적힌 글씨를 읽어내던 찬열의 시선이 저를 마주 했을 때, 백현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혹시 그가 저를 알아볼까 평소라면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나 이번에 제가 느낀 감정이 두려움 뿐이 아니라는 것을 백현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기억 속, 아직 그가 저에게 소리를 내지르기 전.. 조용히 비가 내리고 익숙하던 주변의 소음들이 점멸하는 순간의 어렴풋한 기억. 하지만 잊을 수 없던 기억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 .. 세상이 이렇게 고요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


그의 목소리에 편안함을 느낀 것은 왜일까.


“비가.. 금방 그칠 것 같지 않네.”


그의 목소리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누군가 이렇게 따뜻한 목소리로 저에게 말을 걸어준 적이 있었을까.
 

“지금 내가 들을 수 있는 게 당신 목소리 뿐인데.. 소울메이트.”


그러나 찬열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며 백현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서둘러 도망치듯 그의 곁을 벗어나려 했다. 적어도 그의 손에 잡히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의 커다란 손이 닿은 팔을 잠시 내려다보던 백현은


“너..”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발 밑으로 떨어질 듯 놀랐다. 혹시 그가 저를 알아챘을까 여기서 어떻게 도망을 쳐야 할까 어떤 변명을 해야 할까. 순식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의 시선을 느끼고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면서도 그랬다. 그가 자신의 옆으로 저를 앉힐 때까지도 백현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자신이 여전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다시 흐릿한 지평선 너머를 향했을 때 백현은 안도했다. 

 

“여기 있어라.”

그것이 단지 그에게 변명같은 말을 쏟아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대한 안도인지 그가 아직 저를 알아보지 못해서 하는 안도인지, 조금 더 그의 곁에 머물러도 되는 상황에 대한 안도인지는 몰랐지만. 

그의 곁에 앉아 저를 바라보지 않는 그를 훔쳐보며 백현은 깨달았다. 아직도 더 깨달을 감정들이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제 안에 이런 감정들이 숨어있을 것이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비가 내리는 것은 저에겐 슬픔도 고통도 괴로움도 아니었다. 아무 감흥조차 없었다는 말이 아마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만나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백현은 .. 그의 목소리만이 가득한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 아마 그는 몰랐겠지. 아니, 알고 싶지 않겠지.




그 뒤로도 백현은 스스로를 숨기고 그 마음을 숨기고 늘 숨을 죽이고 행동했다. 그의 곁에 머물기 위해서였다. 다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그를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에게 받은 다정함에 놀라지 않으려 노력했다.



-

그러나 그는 제 생각보다 더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백현은 자꾸만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그의 목소리를, 제 곁에 머무는 온기를 마주할 때 마다 몸을 움츠렸다. 그럴 때마다 백현은 제가 가장 잘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다정한 사람들은 무섭다.

그는 무섭다.

그의 다정함이 저를 얼마나 무너트리는 지 그는 모른다. 

 

그가 하는 밥을 먹고,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두려웠다. 학교를 오고 가는 시간에 그와 나란히 발을 맞춰 걷는 것도 그랬다. 


누구에게도 원하지 않았던 다정함이었으나, 

가장 원했던 그였다.

백현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그가 간절했다. 


그리고 백현은 언제나 그에게 제 정체를 들킬까 두려웠다. 그러나 그 두려움만큼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백현의 마음이 천길로 갈라지듯 어지러운 것은 전부 찬열의 탓이었다. 

두려워도 좋았다. 그가 언젠가 저를 증오하게 되어도 좋았다. 그가 좋았다. 그걸 깨닫고 나니 백현은 매 순간 가슴이 벅찼다. 제 가슴 속 작은 공간 안에 두려움과 설렘, 아픔과 기쁨이 공존하며 서로를 내쫓으려 발버둥을 치는 듯 했다.

그의 시선이 저에게 향할 때 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 마다 백현은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비가 오는 것 같았다. 세상의 소리들이 전부 점멸해 버려도 좋았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랬다. 그가 영원히 자신의 존재를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라도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느릿해진 걸음걸이에 그가 조금 취했다고 생각하며 제가 택시를 잡는 것이 나을 거라 판단한 백현은 도로 위로 뻗어진 팔을 붙잡히며 그의 뒤로 끌려 들어가 다시 인도 위에 서있는 저를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조금 화가 난 듯한 그의 얼굴, 저를 걱정하는 듯한 그의 눈빛을 바라봤다. 그때, 아마 백현은 처음으로 그가 저를 알아봤으면 하고 바랬을 것이다. 차라리 이 다정함이 빨리 끝나기를 바랬던 탓이다. 이 기약 없는 두려움과 설렘이 전부 막을 내렸으면 했다. 그리고 또 두려웠다. 다시 그가 없는 적막 속으로 굴러 떨어질 제 모습이 그랬다.
 

그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길 반복하는 것을 바라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백현은 눈시울이 달아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손이 닿은 팔이 뜨겁게 느껴졌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어째서 열이 오르는 것일까.. 택시가 곧바로 그의 앞으로 서지 않았더라면, 아마 백현은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택시에 올라탄 백현은 택시 안이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제 눈시울이 붉어진 것은 아무도 보지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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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저에겐 평범하지 않은 것들이 바로 그와의 하루 하루였다. 백현은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 시간이 즐겁다는 것도, 곁에 있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기분을 느끼는 것도 전부 처음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를 만나고 줄곧 그랬다. 그의 곁에 있는 것이 좋았다. 그가 좋았다. 그래서.. 더.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다시 혼자 남겨지게 되는 것이,

다시 회색빛의 세상으로 혼자 굴러 떨어질 날이 두려웠다.

그때는 반드시, 지금의 기억들이.. 지금 이 순간들이 제 안에 남아 저를 괴롭힐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에겐 의미 없이 뱉은 말들 하나하나가 저에겐 큰 의미가 되어 내려 앉는 것을 느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백현은 매 순간 가슴을 쳤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백현은 매 순간 울지 않으려 노력했다.   



-

그가 챙겨준 도시락의 무게와 따뜻한 목도리.

 

“중간에 챙겨 먹어야 한다 길래.”

“춥게 좀 다니지 마라.”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백현은 밥과 함께 울음을 삼키며 다짐했다. 울지 않을 거라고. 시험 잘 보고, 그를 다시 만나러 갈 거라고. 이따 보자는 그 말을 믿을 거라고. 그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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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시험이 끝났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시험장을 빠져나와 학교 앞에서 자신들의 아이가 나오길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백현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가볍던 걸음이 조금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울지 않겠다고, 그를 다시 만나러 가겠다고 다짐했는데,


백현은 스스로가 우스웠다. 제가 언제부터 이런 것에 연연해 했다고.. 조금 어이가 없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백현은 문득 제 턱 끝을 간질이는 느낌, 추위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따스한 목도리를 발견했다. 백현은 시선을 내려 제 손에 들려있는 아까와는 다른 무게의 도시락 통을 바라봤다. 다시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이는 이따금 손끝으로 도시락 통 위를 매만졌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백현은 걸음을 늦추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고 불이 켜진 거실로 들어서는 제 기척에 찬열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셔츠와 정장 바지를 갖춰 입은 채로 들고 나온 자켓을 식탁 의자 등받이 위로 대충 걸쳐두었다. 아마 사무실에 갈 준비를 하고 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백현이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조금 숨이 벅찼다. 걸음을 재촉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찬열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고생했다.”

 

찬열의 얼굴을 바라보며 백현은 잘 다녀왔다는 인사를 건냈다. 그는 듣지 못할 인사였지만 아마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제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서자 그는 제 손에서 빈 도시락 통을 가져가며 물었다. 괜찮았어? 무엇에 대한 질문인지 깨달을 새도 없이 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심히 목도리를 풀어냈다. 그에게 다시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의 앞으로 목도리를 내민 백현이 찬열을 올려다보자 그 시선을 느낀 그가 식탁 위로 대충 도시락 통을 올려두고는 저를 돌아봤다.  

 

제 손을 바라보던 찬열이 웃으며 말했다. 

 

“하고 다녀. 이제 더 추워질 테니까.”

 

그는 다정하다.

그의 다정함이 얼마나 저를 무너트리는 지, 

그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

이번 편 .. 백현의 시점은 제가 호우주의보를 처음 생각하면서 가장 보고 싶던 것들 중 하나입니다. 아이의 시점으로 과거의 일들을 돌아보면 하나하나 다 찌통인거라 ..8ㅅ8


호우주의보 연재가 빨라(?)진 것은 요즘 .. 이거밖에 생각을 못해서 일거에요. 외전이라 조금 짧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입니다. 허허-


꿈속에서 그댈 만날수 있다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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