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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est _ 15

 

 

 

 제가 이러는 것이 오기이고 심술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솔직히 도경수와 변백현 사이에서 어떤 말이 오고 갔는지는 알지 못한다. 아니 예상도 안됬다.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된 걸까. 

우연일까, 아니면 약속을 했던 걸까.

 둘의 사이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들은 것도 그 후로 백현이 도망치듯 사라져 버린 일도 전부 소문으로 들었던 저였다. 

 그 당시에는 그 소문들마저 흘려듣기 일수였다. 자꾸만 그에게 향하는 제 의미 모를 관심이 조금 두렵기도 했으니까. 

 

 저를 몰라보는 백현에게 심술을 부렸던 것도 맞다. 그가 알아봐 주길 바랬으니까. 

 그에게 저 같은 건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땐 그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도 저를 이용할 생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제 시선이, 제 마음이 자꾸만 그에게로 움직였다. 

 그리고 이제는 정확히 알게 되었다. 

 제가 처음부터 그에게 느끼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처음부터 그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단 한번의 만남으로 그를 제 머리가 아닌 마음속에 깊이 숨겨두었던 제 스스로가 한심할 정도로 그는 끝까지 저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거칠게 차를 몰아 도착한 것이 다시 백현의 호텔이었을 때, 그는 제가 어떻게 거기까지 다시 갔는지 따위를 따질 겨를조차 없었다.

 지금은 그냥 백현을 만나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초인종을 눌러도 반응 없는 문 앞에 서서 점점 초조해지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아직 도경수와 함께 있는 걸까. 자꾸만 시계 위로 눈을 돌리는 제 행동을 깨닫지도 못하는 그였다. 

 

 

 처음 그가 제 품 안에서 숨을 쉴 때면 숨이 가빴다. 물론 그의 시선은 저에게 닿아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그를 안고 있는 것이 저라는 것. 그거 하나로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제 마음이 다치는 것 쯤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도경수라니.

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늘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는 듯 둘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던 도경수와 변백현을 지켜보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저는 그 두 사람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도 제 손길에 떨리는 작은 몸도 전부다 지금 제가 주는 흥분감에 젖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기에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저에게 안기는 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찬열은 결국 지끈거리는 머리를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담배가 말리는 기분에 미간을 찌푸린 그가 시동을 걸고 거칠게 핸들을 틀었다. 머리를 비워내는 데는 일 만한 게 없었다. 

 

 

 

 생각했던 대로는 아니지만..

백현은 아주 오랜만에 푹 잠을 잘 수 있었다.

 

 섹스를 하다 하다 지쳐서 잠들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기절 하듯 잠이 든 제 몸과 얼굴 위로 분주하게 입술을 내리 누르던 찬열을 잠드는 순간까지도 느꼈다. 화르륵- 얼굴이 다시 붉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눈 뜨자마자 이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해질 줄이야. 소문처럼 제가 방탕하게 놀아나거나 만나는 남자들마다 잠자리를 가졌더라면 면역이라도 있었을까, 저에겐 찬열의 손짓 하나 몸짓 하나가 전부 면역이 없는 상태였으니 머릿속이 이 난리가 난 것일테다. 이불 속에서 꼼지락대며 혼자 빨개졌다 하얘지던 백현이 슬며시 시트를 끌어내렸다. 


 눈을 굴려 옆자리를 확인한 백현은, 찬열은커녕 그의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은 시트 위를 바라봤다. 조금 허탈한 기분이 들기도 전 그가 누워있던 자리 위에 올려져 있는 종이를 발견한 백현이 손을 뻗었다. 그의 시선이 종이 위로 정갈하게 쓰여진 글자 위를 훑었다.

-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


 그 10글자도 안되는 듯한 짧은 문장이 이렇게 서운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 금방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낀 그의 입꼬리가 축 쳐졌다는 것을 백현 본인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끙..”

 백현은 팔을 뻗으며 기지개를 켜려던 것을 멈추고 허리를 토닥였다. 상체를 일으키기도 전에 찌르르-한 고통이 밀려 든 탓이다. 아직 바닥을 짚지 않은 다리와 엉덩이 쪽도 아릿한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망할... 백현은 다시 베개 위로 얼굴을 파묻으며 한숨을 뱉어냈다. 

 아.. 이래서야. 출근은커녕 욕실까지 가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자 급하게 제 몸을 내려다본 백현은 찬열의 밑에서 휘둘리던 어젯밤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제 몸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잠든 제 몸을 어떻게 씻겼는지 모르겠다. 아.. 젠장. 박찬열..  이런건 너무 부끄러운데. 백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시트 아래로 얼굴을 숨겼다. 

 

 백.현아, 하. 변백현.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며 제 이름을 부르던 그의 모습이 다시 머릿속으로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백현아-”

 헉. 백현은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굴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실오라기 하나 걸쳐져 있지 않은 나신을 준면에게 들킬 순 없다고 판단한 백현이 몸을 일으켜 후다닥-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가 문을 닫고, 닫힌 문 뒤로 등을 대며 숨을 고르다 제 손에 들린 쪽지를 내려다봤다. 그래, 당신이 없는 게 낫지. 

“일어났니. 백현아?”

“어어-!”

“왠일로 일찍 일어났네. 착하게. 그럼 씻고 내려와.”

“어, 응! 알았어!”

 욕실 바로 앞에서 들리는 준면의 목소리에 백현은 서둘러 수도꼭지를 돌리며 물을 틀어두고 식은땀이 흐른 것 같은 이마를 닦아내며 얼굴을 들어올렸다. 

 거울에 비친 제 자신과 눈을 맞춘 백현이 눈을 깜빡이다 제 몸 여기저기 찍혀있는 붉은 자국 위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의 손끝이 그 위를 매만지듯 움직이다 멈칫했다. 

 제 몸에 수놓아진 붉은 자국들이 무엇인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찬열의 입술이 내려앉았던 자리 위를 그리듯 남은 흔적들을 손 끝으로 매만지던 백현의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쩜, 잠시도 저를 가만히 둘 생각을 안하니.. 

원망 섞인 목소리를 뱉어낸 백현이 천천히 바닥으로 쭈그려 앉으며 아야야-앓는 소리를 뱉어냈다. 

“아유..다리야.”

 백현은 제 허벅지 위를 통통-주먹으로 두드리다 제 다리를 그러 안고 무릎 위로 이마를 묻었다. 

 

 

 

“백현아. 너 선 봤다며?”

 준면은 제가 생각지도 못한 화제를 꺼내들었다. 왜 말 안했어? 이어지는 목소리가 제법 화가나 보여서 백현은 괜히 모르는 척 시선을 피했다. 

 생각해보면 이건 아직 해결되지 못한 일들 중 하나 였을뿐인데, 어제부터 가출했던 제 정신이 잃어버린 게 찬열과의 통화 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 ..형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모르면 안되지.”

“음..”

“어땠어?”

“그냥, 뭐.. 갑자기 만나서. 아직 이름이랑 얼굴밖에 몰라.”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억지로 만날 필요 없어.”

 아직 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동생이 또다시 상처 입을까 걱정하는 형의 마음을 백현은 모르지 않았다. 

“형, 내가 애야?”

“응. 애야. 한, 세 살 정도 되는 거 같아.”

“치..”

 볼을 부풀리는 백현의 이마를 툭 튕기며 웃었다. 백현은 아픈 이마를 손으로 쓸어내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준면의 말대로 애처럼 굴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해결된 것은 단 하나도 없으면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처럼 굴었다. 

 

 백현은 자신의 감정 변화를 눈치채기도 전에 제가 저지른 일들을 떠올렸다. 그가 제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를 밀어낸 것은 무거운 감정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고 그를 이용하는 스스로가 느낄 죄책감 때문이었다. 결국 저는 늘 제 스스로를 지키고자 남을 상처 입히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결국, … 그를 이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거운 공기에 준면은 제가 괜한 말을 꺼냈다고 생각했다. 지금 가장 힘든 것은 백현일텐데.. 제가 그를 더 힘들게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민석이 없는 와중에 제 식대로 해결을 해보고자 하는 마음에 조금 앞서갔던 것인데 백현에겐 무리였을 지도 모른다. 

 

“형.. 나 어제 경수 만났다.”

“어. 경수는.. 뭐?”

“일 때문에, 한국 왔다 더라.”

“아.그래. 그랬구나.”

 준면은 저를 피하던 눈동자가 경수를 만나서였나 싶어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를 차분히 골랐다. 하지만 이렇게 백현이 먼저 그의 말을 꺼내는 것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준면은 잠시 생각을 접고 백현의 눈을 마주했다.   

“나는 사실 그 애를 다시 만나면, ..울 줄 알았거든.”

“..그랬는데?”

“그랬는데, 눈물이 안 나오더라. 어제 그 앨 보는데… 그렇게 보내는데.”

“..”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들더라.”

“그랬구나.”

“그래서.. 이제 정말. 진심으로, 경수가 행복해지길 바랄 수 있을 것 같았어.” 

“다행이네.”

제 말을 차분히 들어주던 준면의 목소리에 백현은 슬쩍 웃어보였다.

 이제.. 나도 행복해 질 수 있을까, 형?

 내가 또 다시 누군가를 상처 입히지 않을 수 있을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말을 전부 알아들은 듯 준면은 백현을 따라 웃으며 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당연하지. 백현아. 

그의 따스한 눈빛이 제가 그토록 원하던 답을 들려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백현은 아무 이유 없이 걸려온 이 전화가 제 기분을 간지럽게 만든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회사에 도착해 오전 업무를 하는 내내 의자 위에서 꼼지락-대며 몸을 움직이던 그가 한숨을 뱉어내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울리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놀라 화면 위를 바라봤다.   

“여보세요..”

[잘 잤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백현은 헛웃음을 삼키며 따지듯 말했다.

“지금 11시 47분 이거든?”

[알아.. 출근은.. 했어?]

“..했지.”

[점심 아직이지.]

“응..”

이제 막 11시 47분을 넘어서고 있는 시계 바늘을 잠시 바라보던 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차분한 목소리에 제 기분이 널을 뛰었다. 

[데리러 갈게. 12시 반쯤.. 괜찮아?]

 짧은 통화를 끝낸 백현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큰일났다. 박찬열 얼굴 못 볼 것 같은데 어떡하지.. 아랫 입술을 잘근대며 한숨을 뱉어낸 백현이 생각해보면 그와 이렇게 시간 약속을 하고 만나는 것도 처음인 것 같은 느낌에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몸부림 치기 시작했다. 

“으으-!”

그 경기 같은 신음 소리에 비서실에 앉아있던 애꿎은 사람들만 놀라고 말았다. 

 

 

 

 백현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숨. 쉬어야지.”

 찬열의 말이 명령처럼 떨어지고 나서야 파- 참고 있던 숨을 뱉어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제가 이렇게 까지 멍청했나 싶을 정도로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얼굴로 열이 올라왔다. 

 

 제가 차에 올라타기 무섭게 제 쪽으로 몸을 기울인 찬열의 입술이 순식간에 제 숨을 삼켜낸 것이 방금 전의 일이었다. 

 백현의 손이 허공에서 맴돌다 그의 어깨 위로 닿자 찬열의 엄지가 그의 볼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깨가 굳은 백현을 바라보던 찬열이 상체를 떼어내고 그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숨을 멈추고 있던 저를 바라보던 찬열이 잘게 웃었다. 다정한 목소리에 백현의 눈동자가 떨렸다. 얼굴..못 볼 것 같았는데.. 정말, 못 보겠어. 

 

“몸은..괜찮아?”

 백현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저를 보는 진득한 눈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왠지 괜찮지 않다고 하는 편이 더 안전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찬열은 차에서 내려 제 옆으로 다가서는 순간 제 허리 위로 손을 올려 매만졌다. 그 온기에 백현이 놀라 저를 올려다 보는데도 정작 그의 시선은 제가 아니라 정면을 향해 있었다. 백현의 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지난번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으려는 모양인지 딱 제가 먹을 만큼의 양을 주문하며 찬열을 흘기듯 바라봤다. 의자 위로 등을 기댄 찬열은 어깨를 으쓱이며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침엔.. 언제 간거야?”

“..”

“음, 아니. 난 그냥. 혹시 형이랑 마주..”

“변백현.”

“어?”

“지금 그거 내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

“뭐?”

“조금. 서운해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아,니거든-”

“그럼 아까 그 질문 다시 해야겠네.”

“무슨 질문?”

“잘 잤어? 백현아?”

 아.. 백현은 고개를 숙이며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감췄다. 전화를 하자마자 첫 마디로 그 말을 뱉어낸 이유가 이런 것이었나. 같이 아침을 맞이하지 못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그의 표정을 되새기며 백현은 눈을 감았다.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뭐 이런 남자가 다 있냐.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바로 싸가지 없는 남자로 정정했던 찬열은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더 더, 저에게 순수하게 싸가지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왠지 익숙한 기분이 드는 건 뭐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순수하게 싸가지가 없던 사람이 저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도 얼마 전인데, 이젠 아주 부끄러움도 모른 채 저를 몰아붙이고 있다. 

 

 생각해보면 그의 생각이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들은 적은 없었다. 전부 제 추측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를 의심하거나 그가 저를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걸까.. 그를 어떻게 이렇게 신뢰하는가.. 그에게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건가.. 백현의 죄책감이 점점 몸을 키워갔다.

 

 


“혀엉-”

“? 웬일이야?”

“나..충전..”

백현은 다짜고짜 제 오피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축 쳐진 어깨를 바라보며 웃었다. 공연이 끝나고 휘몰아친 과제로 한창 바빴던 종인은 삼일 내내 잠도 못 잤다며 중얼거리며 제 쪽으로 다가섰다. 백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 쪽으로 비틀거리며 움직이는 종인을 받아냈다.

“어이쿠- 무거워라.”

“아..형… 나 죽을 거 같아.”

“애기네. 애기야.”

백현은 그의 등과 엉덩이를 투닥이며 소파 쪽으로 움직였다. 제 무게보다 무거운 종인을 끌 듯이 움직이느라 끙-소리를 뱉어낸 그가 느릿하게 소파 위로 무너지자 종인은 제 위로 아예 눕 듯이 올라탔다. 

“아휴 무거워. 우리 막내 우량아야?”

“5분만 잘래..너무 졸려.”

분명 5분이 아닐 거라는 건 알지만 백현은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지금 그를 밀어낼 힘도 남아있지 않아서 등을 쓸며 저도 눈을 감았다. 제 어깨 위로 닿는 숨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얼씨구.”

 백현은 잠결에 몸을 비틀며 뜨거운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불? 얼씨구? 잠에 취한 눈동자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던 동그란 눈동자에 저를 내려다보고 서있는 얼굴이 비춰지자 백현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언제 왔어. 형?”

“그러는 너네는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니.”

“너네..?” 

 백현은 준면의 시선을 따라 제가 파고들던 방향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아 그리고 보니 이불이 아니라, 종인을 덮고 자고 있었지. 

 제 옆으로 길게 누워있는 잠든 얼굴 위를 바라보던 백현이 저를 감싼 팔의 무게를 느끼며 그 밑으로 손을 뻗어 등을 토닥이자 준면의 눈썹이 다시 꿈틀댔다. 

“좁아터진 소파에서 뭐하는거야. 일어나-”

 제 팔을 위로 잡아당기는 힘에 상체를 일으키던 백현이 다시 종인의 팔에 눌려 눕혀졌다. 준면은 종인의 귀를 잡았다. 

“아아-!!”

“너 언제부터 깨어있었어!?”

“아, 아프거든! 놓고 말해!”

 종인이 펄쩍 뛰며 소파 위로 올라섰다가 다시 내려갔다가를 반복하며 준면의 손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준면은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깨어있었다니. 제가 온 걸 뻔히 알면서 누워있었겠다. 괘씸한 탓이었다. 

 

 

 준면이 백현을 찾은 것은 오늘 있을 파티에 함께 가기 위해서 였다. 주최자가 준면의 지인으로 백현도 몇 번 마주했던 사람인데 이번에 백화점에 입점한 브랜드의 대표였다. 

 런칭기념 이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상 몇몇 반류들만 초대해 열리는 자리라고 백현도 업무상 마주치게 될지 모르니 얼굴을 익혀두라는 뜻이었다. 

 


 준비를 하고 준면과 함께 도착한 연회장은 평소보다 조금 작은 규모였으나 잘 모르는 제가 보기에도 테이블 위를 장식한 센터피스와 세팅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 듯한 분위기, 음식과 술에서 조차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의 자리였다.

  회장 안을 둘러보던 준면이 주최자를 찾아 움직이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바쁘게 움직였다. 저를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 것을 등 떠밀어 보낸 백현은 한가롭게 연회장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백현은 주최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제가 늦게 온 탓에 꼭 그를 따라온 기분이 들었다. 

 아직 제가 온 것은 알지 못한 찬열이 웃으며 잔을 기울이는 것을 바라보던 백현은 괜스레 민망해지는 기분에 테이블 위로 널려있는 와인 글라스를 들어 올렸다. 목도 마르겠다 서둘러 입술부터 대고 보니 dry한 와인의 향이 혀 끝을 맴돌았다. 

 

 자꾸 시선이 닿는 것을 애써 무시하려 아예 몸을 돌렸는데도 자꾸만 목소리가 넘실거리며 저에게 닿았다. 꽤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모양이라니.. 

 백현은 포기한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찬열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 큰 눈을 휘며 밝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평소에는 저런 얼굴이구나.. 조금 밝은 목소리까지 그가 낯설게 느껴지는 탓에 백현은 들고 있던 잔을 금세 비워냈다. 왠지 타는 듯한 갈증이 일었다.

 

 고개를 젖히며 와인을 입 안으로 털어낸 백현이 빈 글라스를 테이블 위로 올려두며 고개를 들었을 때, 찬열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후였다. 설마 벌써 돌아간건가. 저를 보지 못한 것일까.. 백현은 왠지 기분이 가라앉는 느낌에 다시 테이블 위로 손을 내렸다.

 한잔만 더 하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는데 제 손가락 끝에 걸린 글라스가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커다란 손 안으로 안착했을 때, 백현은 시선을 들었다. 

“한잔만 해.”

 언제 제 옆으로 다가온 것인지 찬열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자 백현은 눈을 굴리며 그에게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한잔만 더 하려고 했는데.”

“도수 꽤 높아.”

도수 까지 높으면 더 좋은 것 아닌가. 그의 말을 받아치려던 백현은 제 시선에 맞춰 떨어지는 찬열의 시야에 놀라 얼굴을 뒤로 물렸다. 그 행동에 아랑곳 않고 고개를 따라 움직인 찬열이 백현의 코 앞까지 다가왔다. 

 서로의 숨이 엉킬만큼 가까운 거리에 굳어지듯 행동을 멈춘 백현을 내려다보며 찬열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킁킁-숨을 들이마셨다. 백현은 잠시 멈칫하던 손을 올려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뭐..”

“아직 취하진 않았네.”

“이..제 한잔 마셨거든..?”

고개를 돌리며 그의 어깨를 밀어내는 손에 힘을 주었지만, 찬열은 쉽게 밀려나줄 생각이 없다는 듯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제 손에서 빼앗아 든 와인을 들이킬뿐이었다. 

“그래?”

“그래. 그러니까 좀. 떨어져.” 

“..왜?”

 가까운 거리에 그의 향기가 점점 짙어지자 백현은 조금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마치 그에게 안겨있는 듯한 느낌에 마른 침을 삼켜낸 그가 입술을 달삭였다. 찬열은 그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제 쪽으로 더 다가설 뿐이었다. 

“그러니까 어..음. 숨. 쉬기가.. 조금, 힘.드니까..”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바로 옆에 서있던 그에겐 정확하게 전달이 된 모양인지 백현을 내려다보던 찬열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천천히 밑으로 내리 깔렸다.

“..변백현.”

“어?”

“자극 하지마. 나도 지금 참고 있는 중이니까.”

뭐? 하고 되묻지 못한 것은 제 손바닥 위를 슥-스치듯 닿았다 떨어지는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열감 때문이었다.

 

 

“어. 백현씨!”

 두 사람의 분위기를 환기 시킨 것은 낯선 목소리였다. 찬열은 백현의 손목을 스치듯 매만진 손을 제 바지 주머니 안으로 미끄러트렸다. 

“..?”

 백현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제는 이 패턴이 조금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여기는 또 어떻게 알고 왔는지.. 지석은 제게 손을 흔들며 다가섰다. 제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 이렇게 피곤한 일이었나 싶었다. 하..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뱉어낸 백현이 제 앞으로 다가선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저와 제 옆에 서있던 찬열에게로 옮겨가는 것을 바라보던 그가 아.. 잠시 벙찐 듯 찬열을 돌아봤다. 

“아, 친구 분이랑 같이 계셨군요.”

 찬열은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남자를 바라보던 얼굴을 돌려 백현과 눈을 맞췄다. 맞닿는 시선에 조금 뜨끔하여 다시 고개를 돌린 그의 옆 선을 바라보던 찬열은 술 잔을 돌리며 고개를 숙였다. 제 앞에 이 남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파티에서 인사를 해오는 사람이 한둘은 아니니까. 

 

 그런데 친구라.. 찬열은 왠지 오랜만에 듣는 듯한 저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술친구, 백현이 저를 부르던 호칭이 다시 떠오른 탓이었다. 친구는 아니라고 정정하고 싶었지만 그럼 저를 뭐라고 소개할 지가 난감했다. 

 백현에 대한 제 감정을 인정하고, 그를 안았다. 분위기에 휩쓸린 것인지, 아니면 그냥 수동적으로 저를 따랐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제 품 안에서 잠들었던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백현의 감정을 확신 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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