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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이블 하나를 혼자 독차지하고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턱을 괴고 제 앞에 놓인 와인글라스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그를 발견한 이들의 입술이 열렸다.


“저거.. 변백현 아니야?”

 아마 맞을 걸? 백현은 제 이름이 이사람 저사람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지금의 상황이 썩 맘에 들진 않았지만, 짐짓 모르는 척을 하는 중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제가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데에 있었고, 두 번째로는 그들 중 누구도 제 곁으로 다가와 직접 말을 붙일 사람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저를 왜 초대했는지 모를 이 파티의 주최자는 보이지도 않고 멀찍이 떨어져 저를 이리저리 관찰하는 시선들을 받고 있던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투명한 유리잔을 들어 입가로 끌어당겼다.

  그래, 이정도면 많이 참았잖아.

이런 제 행동을 합리하듯 중얼거린 속마음은 미지근한 와인과 함께 꿀꺽, 그의 목 안으로 삼켜졌다.

“도대체, 차지운은 무슨 생각으로 쟤를 불렀데?”

“술이 남아돌았나보네.”

“무슨 알콜중독자니? 여기 있는 술을 다 마실 생각 인가봐 쟨,”

 백현의 앞으로 빈 잔이 하나둘씩 생겨날 때 마다, 바로바로 치워내던 직원의 걸음이 빨라질 때 마다, 그 무의미한 웅성거림은 백현의 귓가에서 멀어져갔다.



“소은아!”

 여자의 목소리에 때마침 연회장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에게 시선이 분산되자 그를 타고 흐르던 시선들이 하나 둘 떨어져나갔다.

“오랜만이다.”

소은이라 이름 불린 여자는 저를 보며 반갑게 웃는 얼굴에 답하듯 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하곤 제 옆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찬열씨. 이쪽은 유리에요. 김유리, 유리야. 이쪽은 찬열씨. 내가 말 했었지?”

“안녕하세요. 김유리에요. 반가워요.”

“네. 박찬열입니다.”

 짧게 오고가는 인사말에 제 옆에 서있는 여자를 내려다본 찬열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있는 것을 보며 소은은 그에게 팔짱을 끼고 있던 손에 조금 더 힘을 실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제 마음에 드는 남자.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제 머릿속에 자리 잡고 떠나가지 않는 감상평은 그녀의 얼굴 위로 쉽게 드러났다. 

 우습게도. 찬열이 그것을 처음부터 읽어냈다는 것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소은의 이동경로를 따라 함께 움직이던 찬열이 눈에 띄게 허전한 테이블 위로 비틀거리는 뒷모습을 발견하고 의아함을 담았지만 저를 이끄는 팔에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시선이 떨어졌다.

 이제 그만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런 시선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의자를 짚고 일어서던 백현이 비틀거리는 몸으로 테이블 위에 아슬하게 걸쳐져있던 술잔을 툭 쳤다. 하필이면 카페트 위가 아닌 번쩍이는 대리석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 유리잔이 와장창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짐과 동시에 그를 향한 수군거림이 다시 커져갔다.

“변백현 저러다 또 사고치는 거 아니야?”

“남의 파티에 와서 저게 무슨 짓이야?”

 백현은 이제 더 이상 그런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요란한 소리에 잠시 어수선한 실내를 느낀 찬열은 잠시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듯 팔을 내렸다. 회장 안의 거의 모두와 인사를 나눈 피로감이 몰려왔지만 그걸 알아채는 이는 없었다.



“뭐 좀 마실래요?” 

 그녀의 곁을 떠나기 위한 인사치례에 불과했지만,

“아. 고마워요 찬열씨.”

이번에도 그녀는 제 뻔한 의도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제 이름을 들으며 생긋, 웃어 보인 찬열이 멀어지자 유리가 소은의 곁으로 다가와 팔을 툭 밀며 말했다.

“오늘 같이 온다는 말은 없었잖아-”

“뭐, 그렇게 됐어.”


 이런 자리에 함께 참석하기엔 둘의 사이가 공공연히 밝혀지지 않은 터라 그녀의 친구가 의문점을 드러내기엔 충분했으나, 이 자리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찬열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네 번째 만남에 제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 저를 대동할 줄은 생각지 못했는데, 둘의 대화가 어렴풋이 들리자 찬열은 잠시 숨을 돌릴 겸 회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찬물에 손을 씻으며 거울을 올려다본 그의 표정은 방금 전 그녀에게 보였던 미소가 상상되지 않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물기를 닦은 손수건을 휴지통에 던져 넣으며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찬열이 막 restroom을 벗어나 복도로 나왔을 때, 비틀거리는 몸을 벽에 기댄 채 늘어진 남자의 앞에 서서 페로몬을 흘리는 남자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좁은 복도를 가득 메운 향기가 불쾌하게 느껴진 찬열의 시선이 남자의 등을 차갑게 훑었다.

“뭐하는 짓,”

 낮고 차가운 음성에 눈에 띄게 움찔하며 저를 돌아본 남자가 잠시 놀라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끽해야 중간종, 어느 집안인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걸 보면 중소기업의 모질한 놈일게 뻔한 남자의 저급한 행동에 이미 기분이 상했던 찬열이 그 얼굴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꺼지지. 방해되는데.”

 그저 비켜갈 줄 알았던 찬열이 버티고 서있자 남자의 표정은 점점 험악해졌다. 

“칫,”

 그에 반사적으로 점점 어두워지는 찬열의 얼굴을 바라보던 남자가 혀를 차며 멀어질동안 찬열은 그 일련의 행동을 관망하다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댄채로 서있는 남자를 시선에 담았다. 술기운에 붉은 빛을 담은 볼이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였다. 제 앞을 가로막은채 저를 제압하려던 남자의 행동을 깨닫지도 못한 듯 고요한 숨소리가 흘러나오는 입술을 잠시 바라보던 찬열이 고개를 돌렸다. 

 남들이 보면 그를 도와준 것으로 오해할 법한 행동이었지만, 사실 찬열은. 자신이 지나가야할 복도가 아니라 다른 장소에서 그가 지금과 같은 행동을 했다면, 만약 제 길을 막지 않을 어딘가에서 술 취한 사람의 몸을 가로막고 제 페로몬을 흘리는 저급한 행동을 했더라면, 아마 신경도 쓰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까, 찬열은 지금 그의 저급한 행동 이전에 제 길을 막아선 장애물이 불편했을 뿐이었다.

 그가 다시 제 걸음을 옮기던 때, 주륵- 미끄러운 벽을 타고 흘러내려가듯 힘없이 주저앉는 허리를 끌어안은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넘어질 뻔 한 남자를 일으켜 세운 찬열이 제 스스로의 행동에 놀란 듯 잠시 그대로 멈춰서있다 저를 올려다보는 흐릿한 눈동자와 마주했다.

깜빡이는 눈동자에 제 모습이 담기는 것을 확인한 그가 정신을 차린 듯, 손을 놓고 한걸음 물러나자 백현은 다시 주륵, 벽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금세 제 다리에 힘을 주며 버티고 섰다.

 결국, 찬열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서 그를 향해 입술을 열었다.

“핸드폰”

 제 앞으로 내밀어지는 커다란 손바닥을 내려다본 백현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자 찬열은 낮은 한숨을 뱉어냈다. 술 취한 사람한테 이성이란 걸 바란 제 잘못이지. 누굴 탓할까. 지금의 상황에 대해 스스로를 탓하며.

“연락은 해야 될 거 아냐. 데리러오라고.”

“아.”

 멍청한 감탄사에 이젠 한숨조차 나오질 않았다. 애초에 끼어들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제가 뒤돌아선 후의 상황이 조금 전과 흡사하리라는 생각이 스치자 발걸음을 돌리지도 못한 찬열은 느린 동작으로 제 주머니를 뒤지고 있는 백현을 내려다보며 팔짱을 꼈다. 물론, 지금 제가 그의 행동을 참아내는 것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그’ 변백현이기 때문이었다. 열여덟, 사교계에서 마주친 후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이름.

“..아,”

 느릿하게 제 몸을 여기저기 훑으며 주머니 안을 배회하던 손이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한번 더 감탄사를 흘리며 자켓 안주머니로 향했다가 빠져나왔다. 그 기다란 손끝에 아슬하게 걸린 카드를 발견한 찬열의 눈빛에 의아함이 떠오른 것도 잠시, 그게 뭐라고 자랑스럽게 제 눈앞에 흔들어대는 행동을 따라 움직인 찬열의 시선이 그 안에 찍힌 익숙한 호텔이름과 룸 넘버를 확인하고는 백현의 얼굴로 옮겨갔다.

 저를 올려다보고 서있는 멍한 눈빛을 마주한 찬열의 미간이 다시 찌푸러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익숙한 걸까. 아니면, 경계심이라는 게 전혀 없는 사람인가. 조금 전에 제가 무슨 일을 당할 뻔한 것인지 알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 생각은 백현이 눈을 감아 저의 시선을 피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날아갔다.

“하..”

 제 관자놀이를 두어번 문지르던 찬열이 백현의 손에서 미끄러지는 카드키를 받아내고 무의식적으로 쓰러지는 작은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익숙하게 한숨을 뱉어냈다. 고요한 주위를 둘러보며,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 없는 지금의 상황에 눈을 꾹 감았다.

 



 침대 위로 축 늘어진 몸을 던지듯 내려둔 찬열은 땀이 맺힌 이마를 쓸어내며 백현을 훑었다. 뒤척이며 이불 사이로 파고드는 그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리고 돌아서 거실로 나온 그가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를 들이키며 룸 안을 굴러다니는 술병의 개수를 눈으로 세다가 고개를 털어냈다. 

도대체 지금 제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제 품에 안겨있던 백현을 내려다보며 수천 번 곱씹었던 말이건만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말이었다.

“으음..무울,”

 어렴풋이 들린 음성에 정신을 차린 찬열이 제 손에 들려있던 생수병을 내려다보다, 냉장고를 열어 새 생수병을 꺼내들고 걸음을 옮겼다. 

미간을 찌푸리고 제 목을 더듬는 손끝을 바라보다 차가운 생수병을 툭, 그의 팔에 가져다대자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병을 낚아챈 백현이 한 쪽 팔꿈치에 상체를 지탱하며 비스듬히 일어나 물병을 입에 가져다댔다. 

열심히 고개를 뒤로 젖혀봤자 뚜껑이 열리지 않은 생수병에서 물이 나올 리가 없음을 그는 모르는 것 같았다. 눈도 뜨지 못한 채, 고개만 꺽는 그의 멍청한 행동에 쯧, 하고 혀를 찬 찬열이 침대 위로 올라갔다. 

 백현의 손을 잡고 병의 뚜껑을 열어 그의 입술 위로 가져다대자 차가운 물이 그의 입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몇 번이나 팔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리는 행동에 찬열은 한 손으로 그의 뒷 목을 받쳐주었다.

“하.”

갈증을 해소한 백현이 제 입술에서 생수병을 떼어내며 다시 몸을 뉘이자 찬열은 그의 손에서 미끄러진 생수병을 낚아채 협탁 위로 올려두었다. 아직까지 그의 목 뒤를 받치고 있던 찬열의 손등이 침대 시트 위로 닿았다. 

 얇은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숨소리가 가까이 들리자 찬열이 제 손을 빼내며 몸을 일으켰다.

“음,”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와 동시에 제 쪽으로 돌아누운 백현의 팔이 저를 끌어안지 않았더라면,

 찬열은 잠시 제 행동을 멈추고 저를 끌어안은 가느다란 팔의 무게와 제 옷감에 닿는 숨의 온도를 느끼며 그의 옆얼굴 위로 시선을 떨어트렸으나 곧바로 그를 밀어내고 일어서 방을 빠져나왔다.




 연회장이 있던 층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음을 깨달았다.

“찬열씨,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저를 보며 상기된 얼굴로 말하는 소은의 높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자 머리가 아파왔다.

 제 앞에선 여전히 착하고 고상한 척을 하느라 더 이상 목소리를 높이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얼굴 위로 불쾌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심성에 딱 맞는 얼굴 표정을 바라본 찬열이 잠시 제 진짜 얼굴을 드러내며 미간을 찌푸렸다가 금세 표정을 풀어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제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제 만들어진 얼굴을 보며 우쭐댔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저도 그 발밑에 있는 사람이었음을 모르지 않는 찬열은 그녀의 생각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아직은 제 예상대로 행동하는 그녀가 필요했으니까.

 제 에스코트를 받으며 집 앞에 도착한 소은의 얼굴은 다시 평상시처럼 평온해보였지만, 찬열은 지금 그녀의 연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하루가 매우 길게 느껴졌으니까.

 제 차보다 두 배는 큰 현관 앞에 서서 저를 올려다보던 그녀가 발꿈치를 들고 제 입술 위로 짧은 입맞춤을 남겼을 때도 감흥 없이 서있던 찬열은 제 허리를 끌어안으며 파고드는 행동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가느다란 팔이 허리 위로 둘러지는 순간, 떠올라서는 안 되는 장면이 제 머릿속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얀 시트 위로 어지럽게 얽혀있던 백현과, 

제 허리를 끌어안던 팔, 

제 피부 위로 흩어졌던 숨이 찬열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처음부터, 도와주는 것이 아니었는데.

찬열은 제 뒤늦은 후회 속에 담겨있는 의미도 깨닫지 못한 채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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